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낙태죄가 7년 만에 합헌에서 '헌법불합치'로 바뀐 것은 실제 이 법으로 인한 처벌이 거의 없어 법 조항이 사문화한데다, 산모의 건강권을 우선해야 한다는 여론의 변화를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헌재의 이번 결정에 따라 정부와 입법부는 내년 말까지 헌재 선고 취지를 존중, 정교한 법 개정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해당 형법 조문을 삭제하거나 개정하는 것은 물론, 모자보건법 개정안도 마련해야 하는 등 과제가 적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정해진 기간 내에 법을 고친다고 해서 그동안 낙태죄를 둘러싸고 빚어진 논란이 모두 수그러들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낙태죄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절박한 목소리가 현실적이고 이유 있었던 것처럼, 낙태죄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사람들도 충분히 진실되고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헌재 결정에 따른 후속입법이 낙태 만연이나 생명경시 등의 부작용을 낳지 않도록 하려면 그간 낙태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던 종교계 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낙태를 반대하는 이들은 낙태가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이기 이전에 태아의 생명권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태아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만 않았을 뿐 분명한 생명을 가진 존재인데, 이를 임신부의 삶에 방해된다고 하여 임의로 제거해버리는 것은 야만적인 행태라는 것입니다.
헌재는 이번 결정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더 우선한다고 판단했으나, 그렇다고 생명권에 대한 주장이 틀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낙태죄를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로 결정한 것도 낙태죄 규정을 곧바로 폐지해 낙태를 전면 허용할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낙태를 무조건 처벌하는 것도 헌법에 맞지 않지만, 사회가 아무런 제약이나 의식 없이 낙태를 하도록 방치해서도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11일, 낙태를 전면 금지한 형법 규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임신 22주를 일종의 '한도'로 제시했습니다.
이날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은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대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는 국가가 생명보호 수단과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은 "의학계에 따르면 현재 최선의 의료 기술 및 인력이 뒷받침될 경우 태아는 임신 22주 내외부터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며 "이렇게 독자적인 생존을 할 수 있는 경우 훨씬 인간에 근접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해 본 여성에게 임신 22주는 사실상 태아를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게 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헌재가 지나치게 범위가 넓은 기준을 제시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보통 임신 12∼16주까지를 초기로 보고, 임신 28주 안팎까지를 중기라고 할 경우 22주차는 임신 중기를 한창 지나는 때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임신 22주가 된 태아는 장기가 형성, 인체의 구조를 갖춘 모습을 띠는데요. 임신한 여성들이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도 이 무렵입니다.
다만 헌재가 낙태 가능 기간을 22주라고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낙태라는 상황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무게를 둘 수 있는 시점의 '데드라인'으로 임신 22주를 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임산부 자기결정권 > 태아 생명권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의 기간에 여성이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낙태 여부를 결정하기까지 충분한 정보를 얻은 뒤 숙고할 시간을 주는 범위에서 구체적인 허용 기간을 정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헌재가 설명했듯 임신 22주차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은 최선의 의료기술이 뒷받침될 경우일 뿐,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태아의 생명권이 보장돼야 할 시점도 최대한 인정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향후 입법 과정을 통해 정해야 할 구체적 허용 기간과 관련해 헌재는 '전인적(全人的) 결정'이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내놓았는데요.

헌재는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며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지는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대한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려면 전인적 결정을 하고 실행할 충분한 시간이 확보돼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번에 낙태죄에 대해 '단순위헌' 의견을 낸 이석태·이은애·김기영 재판관의 경우 임신 초기인 14주 무렵(제1삼분기)까지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해 스스로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들은 "이 시기를 지난 이후 이뤄지는 낙태는 수술방법이 더 복잡해지고 합병증·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신 여성의 생명·건강 보호라는 공익이 더 고려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임신·출산·육아, 여성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 영향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
다만 헌재가 이날 '임신 22주'를 일종의 한도로 제시, 산모 건강과 태아의 생명 존중권 등과 관련해 낙태를 허용할 수 있는 임신 주수에 대한 엇갈린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사회·경제적 이유에 의한 낙태를 허용하는 임신 주기를 의사들이 정할 순 없다"면서도 "해외와 마찬가지로 임신 12∼16주에 시행되는 낙태수술은 산모에게 큰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낙태 허용 임신 주수를 보다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요.
또 다른 산부인과 전문의는 "태아 생존 여부를 볼 때 임신 16주 태아는 의학 발달로 출생 후 기계에 의존한 호흡과 영양 공급으로 생존할 수 있다"며 "16주 이상으로 낙태를 허용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산모 건강을 위해 낙태수술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의학적인 측면에서 낙태 허용 임신 주기는 일관되게 규정하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낙태를 허용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합법적 낙태를 임신 24주까지로 봤는데요. 본인이나 배우자의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전염성 질환, 근친상간·강간에 의한 임신 등 제한적인 경우만 해당합니다.
◆음지에서 행해지던 낙태수술 양성화할 듯, 급증은 기우
일각에서는 이날 헌재 판결에 따라 낙태수술이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음성화됐던 건수가 양성화될 뿐 급증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이번 헌재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요.
이날 오전부터 '릴레이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 시민단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회원들은 오후 2시 45분쯤 헌재 위헌 결정이 나오자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는 승리했다"고 외쳤습니다.
헌재 앞에 모여있던 50여 명은 "역사는 진보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밝은 표정으로 기쁨을 만끽했는데요. 일부 회원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공동행동은 "헌재의 이번 결정은 경제개발과 인구 관리를 위해 생명을 선별하고 여성을 통제·대상화해 그 책임을 전가해온 지난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중대한 결정"이라며 "사회 모든 구성원의 재생산권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로 나가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한다. 여성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는 성평등 사회, 모든 이들이 삶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 같은 시간 헌재 앞에서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기 위해 모인 시민 100여 명은 헌재 결정이 나오자 크게 낙담한 표정으로 분통을 터뜨렸는데요.
개신교 단체와 시민사회단체 79개로 구성된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은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며 "헌재의 헌법 불일치 결정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은 "낙태죄 폐지를 반대한다", "국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라", "국가는 여성과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어 "헌재의 결정은 생명을 보호하는 헌법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판단이다. 인간의 생명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며 "낙태를 하면 아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헌재 결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명목으로 포기한 것"이라며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가장 나약한 태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잘못된 오류의 판정이다.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불과 7년만에 정반대의 결정 내린 헌재…후속 입법과정 진통 상당할 듯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헌재 판단이 7년 만에 바뀐 이유로, 헌재 구성이 전과 달라진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입니다.
다만 낙태죄가 '위헌'으로 바뀌는 과정이 다소 성급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한다고 해도 불과 7년 만에 결정이 정반대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2012년 당시 헌재는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했습니다. 이때 헌재는 "태아는 모체와 별개의 생명체로 생명권의 주체이고, 낙태의 급증을 막기 위해서도 형사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낙태는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낙태를 놓고 우리 사회가 좀 더 진지한 공론화 절차를 밟기도 전에 헌재가 서둘러 결정을 내린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렇다 보니 후속 입법 과정에서 임신중절권 허용범위와 시기·사유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입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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