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2일 발생한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괴한 침입 사건에 대한 북한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 반(反)북 단체와 미국 정부의 ‘합작’이라는 주장까지 불거지는 상황에서 이어지는 북한의 침묵엔 다목적 의중이 실렸을 수 있다. 미국과 협상 모멘텀을 유지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고 체제 결속을 다져야 하는 상황을 고려했다는 분석이다.
적성국에 대한 반대 세력 후원은 미국의 오랜 외교 전술이지만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과 접촉했다는 구체적 진술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건의 배후로 자처한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은 북한대사관에서 가져온 정보들을 미 연방수사국(FBI)과 공유했다고 밝힌 데 이어 중앙정보국(CIA)과의 연계설도 나왔다. 27일(현지시간)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는 소식통을 인용해 용의자 10명 중 최소 2명이 대사관 습격을 앞두고 CIA와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외신에 따르면 FBI가 스페인 측의 요청을 받고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미 정부 소식통은 일부 외신에 “FBI가 스페인 수사관들로부터 대사관 침입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명단을 넘겨받았고, 스페인 당국의 요청에 따라 이 사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북·미 관계의 변수가 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협상 구도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이번 사건은 대북 첩보술의 아주 전형적인 예”라며 “서로 묵인하고 있는 일인 데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이 이를 문제 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북·미 협상이 깨지거나 잘 돌아가지 않을 경우 북한이 이를 미국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유조선의 무게감을 키워주지 않으려는 북한 당국의 입장이 반영됐을 수도 있다. 자유조선이 ‘김정은 체제 타도’를 내걸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자유조선은 28일 홈페이지에 ‘우리 조직의 현재 입장’이라는 글을 올려 “우리는 김씨 일가 세습을 끊어버릴 신념으로 결집된 국내외 조직”이라며 “우리는 행동으로 북한 내 혁명 동지들과 함께 김정은 정권을 뿌리째 흔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올 들어 해외 주재 북한대사관 등을 겨냥한 테러성 실력 행사에 들어간 것이 ‘김정은 타도’를 목표로 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북한 내에 동조 세력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 단체는 2017년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을 탈출시키기도 했다. 김한솔은 ‘백두혈통’의 적장자(嫡長子)로, 현재 김정은 정권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다. 북한은 2011년 평안남도 교도소 출소자 체제 전복 모의 사건, 2016년 5월 김 위원장 열차 폭파 미수 사건 등 그동안 ‘최고존엄’에 대한 도전이나 반역 사건에 대해 ‘무대응’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최고 존엄과 북한 체제에 대한 명백한 도전, 대사관 보안에 구멍이 뚫린 사실 등을 포함해 모든 정황이 북한으로서는 불편하기 때문에 체제 결속을 위해 앞으로도 사건을 공식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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