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 비핵화를 점진적으로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미국 내 이른바 ‘온건파’도 북한에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비건 대표는 11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주최하는 핵 정책 콘퍼런스에 참석해 점진적 비핵화 진행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며 “모든 것을 합의할 때까지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앞으로 대북 협상에서 ‘일괄타결(토털솔루션·a total solution)’ 방식을 채택하겠다는 입장을 굳힌 것으로 해석된다. 또 “대통령 첫 임기 내에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고 싶다”고 밝혀 비핵화 시간표도 제시했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 1월31일 스탠퍼드대학에서 실시한 강연 때와 사뭇 달라진 것이다. 당시 비건 대표는 ‘동시적·병행적’ 비핵화를 주장했다. 또 협상 초기 미국이 ‘포괄적 핵신고’를 선결 요건으로 내세웠던 것을 ‘비핵화 과정이 최종적으로 되기 전 어느 시점’으로 미루면서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도 내비쳤다. 이는 사실상 미국이 ‘단계적 비핵화’를 수용하는 것으로 해석돼,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문 타결을 낙관하는 계기로 작용했었다.

비건 대표의 이번 발표로 미국의 협상 원칙에서 북한이 바라던 핵시설, 핵물질 및 핵무기를 단계별로 떼어 협상할 수 없게 된 것은 분명해졌다. 다만 비건 대표가 얘기한 ‘일괄타결’이 비핵화 전체 로드맵 완성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로드맵 완성과 더불어 단계에 구분 없이 핵시설, 핵물질 및 핵무기를 모두 동시에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각에선 이번 발표로 인해 북·미간 협상 구도가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보는 해석도 제기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비건 대표의 발언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난 뒤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온 정리된 입장으로 봐야 한다”며 “미국 측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미국의 기준으로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란 점을 확인하고, 앞으로 북한에 비핵화와 최종상태 대한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봤다. 남성욱 고려해 행정대학원장은 “비건 대표가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존 볼턴 미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과 방향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며 “전면적 비핵화와 전면적 제재완화를 맞교환하는 방식이 아니면 타결이 어렵다고 이해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북한이 미국의 ‘일괄타결’식 비핵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을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정부가 적절한 중재자 입장을 취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 센터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느낀 것을 기반으로 새롭게 협상 방향을 정비한 것으로, 이번에 바뀐 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북한 경제제재 완화를 언급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게는 조금 어려운 도전이 제기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남 교수 또한 “우리 정부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비핵화를 추동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조언했다.
정선형 기자 linea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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