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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란듯이 경복궁 훼손… 조선의 최후와 일제 독재의 서막 열다[강구열의 문화재 썰전]

[궁궐이야기]민족혼 말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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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09 09:00:00      수정 : 2019-03-11 14:49:40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설립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벌인 치열한 투쟁을 되돌아보는 해가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일제의 통치로 우리가 입은 상처와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를 곱씹는 1년이 되기도 할 겁니다.

 

강점기 36년, 일제는 한반도를 난도질했습니다. 문화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 궁궐의 훼손이 극심했습니다. 일제의 궁궐 파괴는 조선의 지배가 끝나고, 새로 시작된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때의 상처가 워낙 깊어 지금껏 남아 있습니다.

 

◆일제, 경복궁을 지우기에 골몰한 이유는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될 당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5년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립니다.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개회사 중 일부입니다.

 

“본 공진회 개최의 취지는…新舊施政(신구시정)의 비교대조를 밝혀서 조선민중에게 新政(신정)의 혜택을 자각하게 하고…그 결과 조선인으로 하여금 깊이 스스로 반성계발해서 奢侈遊惰(사치유타)의 폐습을 고치고…”

 

폐습에 물든 조선인을 가르치겠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신구시정의 비교대조’는 이를 위한 방편입니다. 신정(新政)은 일제의 통치, 구정(舊政)은 조선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15개의 전시관에 농업, 임업, 광업, 교육, 위생 등 사회 주요분야에서 일제 통치의 성과(?)를 입증하는 전시물을 배치했습니다. 농업의 경우 전국 수확량이 1911년 792만석이었다가, 1914년 1216만석으로 늘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서당, 항교, 성균관 등의 전통 교육을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일제의 교육을 실용성으로 특징지은 것도 있었습니다. ‘문명화된 일본’의 지배로 ‘미개한 조선’이 발전했음을 시각화하고, 지배의 타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려 했던 겁니다.

 

 

조선물산공진회 전경을 보여주는 그림.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눈여겨 볼 것이 공진회 개최지가 경복궁이라는 점입니다. 왜 ‘하필’ 경복궁이었을까요?

 

궁궐 내 건물들만 정리하면 널찍한 공간을 확보하기 쉽고, 서울의 중심지라 관람객들을 모으기에 좋다는 등의 기술적인 고려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다는 아닙니다. 일제와 조선의 통치를 비교하겠다는 공진회의 목적과 경복궁이 가지는 상징성을 연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궁궐은 임금의 거처이고, 최고의 관부(官府)였습니다. 그 중에서 으뜸은 언제나 경복궁이었습니다.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조선의 통치가 끝났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옛날의 지배자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공진회가 끝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워 경복궁을 가린 것도 같은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전면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

◆최고 인재의 산실 홍문관, 기생집이 되다

 

공진회 부지 마련을 위해 일제는 경복궁의 건물을 뜯어내고, 팔았습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전각 4000여 칸이 팔렸습니다. 경복궁은 ‘북궐도형’(北闕圖形·경복궁 평면배치도)에 6806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000칸이면 3분의 2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입니다.

 

팔려나간 건물은 일본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요정과 일본계 사찰, 일본인 재력가의 집 등으로 전락했습니다. 세자가 사용하던 비현각은 남산장이라는 요정의 별장으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던 홍문관은 기생집이 되었습니다. 세자의 거처이던 자선당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설 박물관 건물로 쓰였지요.

 

이런 일들이 공진회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공진회와 비슷한 성격의 ‘조선부업품공진회’, ‘조선가금공진회’, ‘시정20년기념 조선박람회’, ‘조선산업박람회’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교통 불편 문제가 제기되자 동쪽 담장을 없애버렸렸습니다. 동십자각이 지금처럼 궁궐 담장과 분리되어 섬처럼 고립된 것이 이때입니다. 조선부업품공진회를 개최할 즈음에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앞까지 전차선로를 연장하겠다며 서쪽 담장과 그 모서리에 있던 서십자각을 헐어버렸습니다.

 

해방 직후 경복궁에 남아 있는 전통건물은 26동에 불과했습니다. 조선총독부청사, 총독부 청사 1·3별관, 총독부 미술관, 총독부 박물관과 그 창고 등 이질적인 건물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경복궁을 떠올려보시죠. 잔디로 덮힌 빈터가 많습니다. 나무가 잘 가꿔져 있어 탁트인 공원같은 경관입니다. 어떻게 보면 썰렁하기도 합니다. 궁궐의 본래 모습일리 없습니다. ‘구중궁궐’이라 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건물의 처마가 닿을 듯 이어졌을 겁니다. 그 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게 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입니다.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이 이룬 장관은 경복궁의 그것이기도 했을 겁니다. 

 

 

조선 궁궐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동궐도.

◆동물원이 된 창덕궁, 쪼그라든 황궁

 

다른 궁궐들도 훼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 것은 1907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덕궁에 살고 있는 순종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인접한 창경궁을 동물원 등으로 꾸미자고 제안을 했답니다. 조선인들에게 “취미를 부여하고, 지식을 공급하며 고상한 오락을 제공한다”는 등의 선전도 곁들였습니다. 이듬해 동물원이 만들어졌고, 1909년 동·식물원이 개장해 일반인의 관람이 시작됐습니다. 박물관, 장서각 등을 새로 지었으니 있던 건물들을 헐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전인 명정전 일대를 제외하고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1911년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됩니다.

 

일제는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덕수궁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습니다.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선원전, 사성당, 흥덕전, 흥복전 등이 1920년대 초 팔렸습니다. 순종이 즉위한 돈덕전은 1922년 헐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1931년에는 덕수궁의 1만 여 평을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이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궁역 내에 운동장, 휴게소, 매점 등이 설치됐습니다.

 

덕수궁은 14만8760㎡의 궁역에 13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당당한 궁궐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이었고, 각종 근대화 정책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 덕수궁이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훼손되고, 해방 후에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2015년 기준 6만5593㎡, 건물 20동으로 크게 쪼그라들었습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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