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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팔아 돈 번 대한민국에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입양인들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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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26 13:06:32 수정 : 2019-01-25 21: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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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미국으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이 ‘미비한 절차’, ‘부실한 서류작업’ 등을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입양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6·25 이후 약 70년간 발생한 17만여명의 해외입양인 중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추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 살에 고국을 등진 해외입양인이 왜 중년이 된 지금에서야 문제제기에 나선 것일까.

홀트아동복지회가 1956년 12월 해외입양을 위해 띄운 미국행 전세기 내부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해외입양은 아담 크랩서(43)를 대리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아동인권위원회는 지난 24일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를 상대로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허술한 입양 절차로 망가진 크랩서의 인생

26일 민변과 외신 등에 따르면 크랩서는 3살이었던 당시 1979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 미시건주의 한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러나 첫 입양가정에서부터 좋지 않은 부모를 만났다. 가죽벨트로 때리고 지하에 감금하는 등의 학대를 가하던 첫 입양부모는 5년 뒤 직장을 옮기면서 크랩서와 딸을 사회복지기관에 버렸다.

두 번째 가정에 입양됐지만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을 나와야 했다.

본격적인 문제는 크랩서 부부를 만난 세 번째 가정이었다. 양부는 아담의 머리를 잡고 벽에 찧거나 주방기구로 구타하는 한편 화상을 입히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대를 즐겼다. 1991년 이러한 학대 사실이 드러나며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나 곧 풀려났고, 이듬해에 또 다시 범죄적 학대 및 성학대 행위로 붙잡혔다.

크랩서가 수차례 파양을 당하고 버려지고 학대를 당하는 등의 과정에서 입양기관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크랩서는 크랩서 부부와 다툼 뒤 빈털터리로 쫓겨났다. 처음 입양될 때 가져온 한국어 성경과 봉제인형 등을 찾고 싶어 고아원에 침입했다가 주거침입죄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크랩서는 이용원과 실내장식업소 등을 차리고 가족을 꾸리면서 인생의 고비를 넘었다는 생각에 잠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자신에게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국 크랩서는 청소년 시절 등의 범죄경력이 문제가 돼 2016년 11월 아내와 자녀 셋을 미국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추방을 당했다. 범죄 경력 중의 일부는 양부모가 악의적으로 증언한 것도 있었다.

 
◆아이의 행복보다 ‘돈 벌이’ 위한 해외입양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958년부터 2016년까지 해외입양 건수는 총 17만여건에 이른다. 이 중 11만2000여명(약 67.5%)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1979년 한 해에만 크랩서를 포함해 4148명이 해외로 입양됐고, 이 중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는 2347명(56.6%)이었다.

이렇듯 해외입양 중에서도 미국행이 가장 활발했던 이유는 절차가 간편했고, 입양 수수료가 고가였던 것 등이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홀트 부부가 미국과 한국 양쪽 정부를 오가며 이민 및 입양과 관련한 법제를 간소화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입양을 사업으로 명시한 ‘고아양자 특례조지법’과 해외입양의 요건과 절차를 담은 ‘고아입양특례법’ 등이 제정됐다. 이 과정에서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등 입양기관이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등을 통해 많은 난민 유입이 있었던 미국은 난민법을 통해 수용 규모를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1950년 난민법이 개정되며 한국 아동이 미국에 입양을 보낼 수 있게 됐고, 1961년에는 쿼터 제한까지 없어지며 양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60년대에는 매년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는 아동의 규모가 수백명대였지만 1971년부터는 수천명대로 급증했다. 해외입양이 절정에 달했던 해는 1986년으로 당해년도에만 8680명이 해외로 입양됐다. 이 중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는 6138명으로 70%가 넘었다.

아이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고, 행복을 주기 위한 입양보다는 많은 아이를 빨리 보내기 위한 입양이 우선이었다. 크랩서의 변호인 측은 “위법한 수단까지 동원해 무리하게 해외입양이 추진된 원인 중 하나로 한 아이당 1인당 국민소득을 상회하는 수준의 입양수수료가 입양기관에게 지급된 점이 지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홀트인터내셔널 등 미국 현지의 입양기관들에 따르면 아이 한 명을 입양하기 위해 양부모가 지급해야 하는 수수료는 2만7000∼5만8000달러(2017년 기준)로 제시하고 있다. 이 중 1만4000∼2만달러 정도가 한국측 입양기관에게 배당됐다.

◆허술한 입양절차… 한 사람의 뿌리·인생을 말살했다

이러한 광적인 해외입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극에 달하면서 급속히 잦아들었다. 정부가 쿼터 제한 등을 통해 해외입양 공급량을 갑자기 줄였기 때문이었다. 현재에도 입양기관들이 해외입양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국내입양 실적을 채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입양 절차 및 법제도 상당부분 보강됐다. 2012년 입양특례법이 제정되고 겉으로나마 정부와 법원이 개입하는 구조가 마련됐다.

그러나 제도가 개선되기 이전에 입양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다. 오래전 사라진 자료를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00년이 지나면서 1970∼1980년대에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성인이 돼 대거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입양을 보낸 실적에 대해서는 국가별, 기관별로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후 관리에 대해서는 손을 놓았던 탓에 회귀하는 해외입양인에 대해서는 외면하며 정확한 실태파악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다.

AP 등 외신은 최근 보도를 통해 “크랩서 등 해외입양인들은 대부분 부모를 알고 있거나, 부모가 의도치 않게 잃어버린 경우도 많지만 미국에 쉽게 입양되도록 하기 위해 대부분은 버려진 아이(기아)로 입양 서류에 기재돼 있다”고 밝혔다.

해외입양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는 해외의 입양부모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아도 쉽게 한국의 아이를 배달받을 수 있었다. 입양기관들이 유학생이나 배낭여행객에게 아이를 입양부모에게 인계하면 비행기값을 제공하는 ‘에스코트 서비스’를 시행하는 등 입양부모를 위한 갖은 편의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에스코트 서비스가 극에 달했던 1980년대에는 한국 비행기 내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외국인 승객들로부터 숱한 민원 및 불만이 제기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자 대통령으로부터 ‘비행기 한 대당 태울 수 있는 (입양)아동을 10명 밑으로 제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크랩서 측이 한국정부와 홀트 등을 상대로 제기한 이번 소송에서 간소화되고 허술하게 진행된 입양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본격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승소한다 해도 크랩서에게 남는 것은?

이처럼 과거의 흔적이 흐릿한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서 모든 것을 입증해야 하는 소송의 특성상 크랩서의 승소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설사 승소를 하더라도 극히 일부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크랩서 측은 승소해 보상을 받는 것보다는 정부와 입양기관을 법정에 세워 책임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 측은 “원고가 일생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의 책임은 국가와 입양기관에 있다”며 “입양기관은 원고의 해외입양을 추진할 당시 친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홀트아동복지회는 서류에 크랩서를 ‘기아’로 기재한 뒤 미국으로 입양을 보낸 것이다.

변호인 측은 또 “국가는 이후 입양기관의 위법행위에 대해 어떠한 관리·감독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입양기관이 양부모를 대신해 입양절차를 전적으로 대행할 수 있도록 이른바 ‘대리입양제도’를 법적으로 허용했다”고 밝혔다. 에스코트 서비스 등이 행해지며 해외의 입양부모들이 자국에서 아이를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이러한 대리입양제도는 입양의 효율성을 키우고, 결과적으로 입양부모의 만족도를 키우면서 입양기관의 소득을 증대시켰을 수는 있지만 입양의 당사자인 아동의 인권과 행복추구권은 철저히 배제한 처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변호인 측은 “대한민국은 입양기관의 위법한 입양에 조력함으로써 원고를 비롯한 해외입양아동들을 아동학대 등의 위험에 방치했다”고 강조했다.

크랩서의 이번 소송은 해외 한인 사회는 물론 수십만명에 달하는 해외 각국의 입양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크랩서가 미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는 최소 8년이 필요하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모국에서 크랩서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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