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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360년 전 ‘기해예송’ 낯설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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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11 21:10:23 수정 : 2019-01-12 01: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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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승하후 서인·남인 禮 논쟁/ 권력 쟁탈전 현실 정치와 닮아 2019년 기해년의 새해가 밝았다. 역사 속 기해년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180년 전인 1839년 24대 왕 헌종(1827~1849, 재위 1834∼1849) 대에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는데, 이를 흔히 ‘기해박해’라 칭한다. 18대 왕 현종(1641∼1674, 재위 1659~1674)이 왕위에 오른 직후에 벌어진 ‘기해예송’ 또한 정국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집권세력이 되자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 이념이 강화됐고, 그 이념을 실천할 방안으로 예학(禮學)이 발전했다. 그러나 예학의 발전은 반대 정파를 정치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무기로 기능해, 집권세력인 서인과 야당의 위치에 있는 남인이 예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1659년 효종의 승하를 계기로 서인과 남인은 예에 대한 각종 이론을 동원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1659년 기해년에 예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이란 뜻으로 ‘기해예송(己亥禮訟) 이라 칭한다.

기해예송에서 논쟁의 초점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1624~1688) 즉 조대비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얼마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장렬왕후는 15세인 1638년 44세인 인조의 계비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이는 어렸지만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조대비의 상복에 대해 송시열과 송준길 등으로 대표되는 서인 측은 1년복을 주장했다. 효종이 차남이고, 장남인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때 조대비가 이미 장자(長子)에 해당하는 상복(喪服)인 3년복을 입었으므로, 1년복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는 ‘주자가례’를 들었다. ‘주자가례’에는 ‘왕자례 사서동(王者禮士庶同)’이라 하여, ‘왕의 예법은 사대부나 서민의 예법과 같다’고 명시했고, 이를 적용하면 1년복이 맞다는 것이다. 허목, 윤휴 등 남인은 적극적인 반박 논리를 폈다. 무엇보다 효종이 왕인 점을 강조하면서, ‘고례(古禮)’에 근거해 ‘왕자례 사서부동(王者禮士庶不同)’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왕의 예법은 사대부나 서민과는 다르기 때문에 효종이 차남이라는 가계적 혈통보다는 왕위를 계승한 왕이라는 점이 우선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조대비가 왕이 사망한 경우 입는 3년복을 입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남인들의 주장에는 왕권 강화 사상이 내재돼 있었고, 서인의 주장에는 신권 강화의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종은 서인 측 손을 들어 주었다. 인조반정 이후 36년 가까이 서인이 정국을 주도했고, 현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라 왕이라도 서인들의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기해예송은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를 근거로 하여 1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서인 측 승리로 마무리됐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그러나 서인 측의 논리는 효종을 왕보다는 차남이라는 입장을 우선하면서 왕권을 약화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위험한 불씨는 1674년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기해예송에서 패배한 남인 정치인 상당수가 유배를 가면서 그 힘이 약해졌지만,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1618∼1674)가 사망하면서 반격의 기회가 왔다. 이번에도 상복의 주인공은 조대비였다. 서인들은 기해예송 때와 같은 논리로 대비가 9개월 상복을 입어야 함을 주장했지만, 남인들은 이에 맞서 1년 상복이 타당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전에 적용됐던 기해예송의 잘못도 조목조목 지적해 나갔다.

양 파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는 가운데 두 번째 예송인 갑인예송의 승리자는 남인이었다. 갑인예송 직후 승하한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14세의 숙종은 ‘송시열이 예를 잘못 해석했다’고 하면서 서인의 최고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송시열에게 큰 모욕을 안겨 주었다. 갑인예송의 승리로 50년 가까이 야당이었던 남인은 비로소 정치 주도권을 잡는 여당이 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현종 대에 전개됐던 예송논쟁은 예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서인과 남인 간 권력 쟁탈의 양상을 띠게 됐다. 360년 전 기해년에 벌여졌던 예송논쟁이 낯설지만은 않은 까닭은 국익과 민생보다는 정파 간 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재의 정치 현실과도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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