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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돌담길 개방한 덕수궁 역사 이야기

광해군이 인목대비 유폐한 경운궁/ 고종때 개명… 德·長壽 기원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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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14 20:50:30      수정 : 2018-12-14 20:50:30
영국대사관 때문에 막혀있던 덕수궁 돌담길이 지난 7일 완전 개통됐다. 서울시는 덕수궁 돌담길 미개방 구간 일부(대사관 직원 숙소 앞∼영국대사관 후문, 100m)를 2017년 8월 개방한 데 이어 나머지 70m 구간(영국대사관 후문∼정문)도 정식 개방한 것이다. 이제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역사가 담겨 있는 덕수궁 돌담길 일대를 자유롭게 거닐면서 덕수궁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가깝게 체험할 수 있게 됐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가 이듬해 한양으로 돌아와 이곳에 거처하면서 궁궐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원래 덕수궁이 있던 자리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았던 집으로서, 전쟁에도 불구하고 보존이 잘돼 있어서 선조는 임시로 이곳을 왕의 거처로 삼았다. 당시 정릉동에 위치해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 서청(西廳)에서 즉위식을 가졌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거처했다. 1611년(광해군 3) 10월에는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에 보인다. 창덕궁 공사가 완료되자 광해군은 경운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들어갔고, 이후 경운궁에는 오랜 기간 왕이 살지 않았다. 경운궁은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핍박을 받아 이곳에 거처함으로써 다시 역사적인 조명을 받았다. 인목대비를 어머니의 지위에서 폐위하고 경운궁(서궁)에 유폐한 ‘서궁 유폐’는 광해군을 축출했던 1623년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이 됐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경운궁에서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옥새를 받은 후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경운궁은 광해군과 인조, 두 명의 왕이 즉위식을 올린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선조, 광해군, 인조와 인연을 맺은 이후 경운궁은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 경운궁이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경복궁에 거처하다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1896년 2월의 아관(俄館) 파천(播遷) 이후이다. 일제의 위협이 강한 경복궁과 창덕궁 지역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경운궁을 다시 주목했다. 경운궁이 위치한 현재의 정동 일대는 영국, 미국, 러시아 공사관이 밀집해 있어서 일제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897년 2월 고종은 마침내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기고, 청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활용해 이 해 10월 환구단에서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했다. 경운궁은 ‘황제’ 고종이 거처하는 궁궐이 됐고, 대한제국의 중심 공간이 됐다. 고종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새 것을 수용함)을 이념으로 삼고, 강화된 황제권을 바탕으로 국가의 주권과 독립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국방력과 재정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고종은 경운궁 일대를 축으로 전통과 서양식이 절충된 새로운 도시 구조를 형성하려는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정관헌(靜觀軒)에서는 외국 외교사절들을 만나며 이 무렵 즐기게 된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경운궁에서의 대한제국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침략 속에 무력하게 마감됐다. 1905년 외교권을 발탁당하는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이 경운궁의 중명전(重明殿)이었고,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핑계 삼아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던 곳도 경운궁이었다.

1907년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종은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물러난 ‘태황제’가 돼 경운궁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제 경운궁이라는 이름 대신에 고종이 덕을 지니시고 장수하라는 의미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1912년 회갑이 되던 해에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고종의 큰 즐거움이었다. 1916년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다섯 살 딸 덕혜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으나, 1919년 1월 21일 함녕전(咸寧澱)에서 생을 마감했다. 최근 개방된 돌담길을 거닐면서 덕수궁이 쌓아온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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