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가 이듬해 한양으로 돌아와 이곳에 거처하면서 궁궐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원래 덕수궁이 있던 자리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았던 집으로서, 전쟁에도 불구하고 보존이 잘돼 있어서 선조는 임시로 이곳을 왕의 거처로 삼았다. 당시 정릉동에 위치해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 서청(西廳)에서 즉위식을 가졌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거처했다. 1611년(광해군 3) 10월에는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에 보인다. 창덕궁 공사가 완료되자 광해군은 경운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들어갔고, 이후 경운궁에는 오랜 기간 왕이 살지 않았다. 경운궁은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핍박을 받아 이곳에 거처함으로써 다시 역사적인 조명을 받았다. 인목대비를 어머니의 지위에서 폐위하고 경운궁(서궁)에 유폐한 ‘서궁 유폐’는 광해군을 축출했던 1623년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이 됐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경운궁에서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옥새를 받은 후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경운궁은 광해군과 인조, 두 명의 왕이 즉위식을 올린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
그러나 경운궁에서의 대한제국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침략 속에 무력하게 마감됐다. 1905년 외교권을 발탁당하는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이 경운궁의 중명전(重明殿)이었고,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핑계 삼아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던 곳도 경운궁이었다.
1907년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종은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물러난 ‘태황제’가 돼 경운궁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제 경운궁이라는 이름 대신에 고종이 덕을 지니시고 장수하라는 의미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1912년 회갑이 되던 해에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고종의 큰 즐거움이었다. 1916년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다섯 살 딸 덕혜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으나, 1919년 1월 21일 함녕전(咸寧澱)에서 생을 마감했다. 최근 개방된 돌담길을 거닐면서 덕수궁이 쌓아온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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