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시절 받던 다양한 혜택 없어져/사람들 열악한 환경 못 견디고 떠나 야고드노예에서 한 시간가량 달려 콜리마강에 도착했다. 콜리마대로와 같은 이름의 강이다. 이 지역 역사는 콜리마강 개발과 관련 있다. 그래서 도로도 지역도 콜리마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콜리마강은 마가단주에서 발원해 사하공화국을 거쳐 동시베리아해로 흐른다. 콜리마강을 가로질러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현대식 다리가 놓여 있다. 도로와 광산이 개발되면서 채굴된 금을 운반하기 위해 다리 건설이 필요했다. 콜리마강의 첫 다리는 1937년 5월에 완공됐다. 기존 다리 옆으로 나란히 건설된 현재의 다리는 2015년 9월 개통됐다. 옛 다리의 흔적은 새 다리와 나란히 서있는 교각뿐이다. 30분 사이에 이 다리 위를 지나간 차량은 화물차 한 대가 유일했다. 긴 겨울 혹독한 추위 외에도 콜리마대로가 비포장도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듯싶다.
강가에는 새로운 다리 건설을 기념하는 상징물이 서 있다. 교각 모양의 상징물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어 주변 경치가 제법 눈에 들어온다. 멀리 데빈 지역이 보인다. 그곳에는 북동교화노동수용소의 중앙병원이 있었다. ‘콜리마 이야기’의 저자 바를람 샬라모프가 병원에서 치료 후 보조의로 근무하기도 했다. 병원을 토대로 데빈에는 한때 의과대학이 설치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수수만, 우스티네라, 팔랏카 등 주변 도시에서 의사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전체 주민 수가 6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로 전락했다.
앗카 지역은 부서진 건물들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이 공존한다. |
거의 매일 점심을 길에서 해결하니 노상의 식사가 더는 어색하지 않다. 익숙하게 빵과 햄을 썰고 청어 통조림을 따고 버터를 상자에서 꺼낸다. 누구는 물을 끓여 컵라면을 준비한다. 콜리마대로 출발점인 니즈니베스탸흐에서 구입한 물과 식품이다. 그때는 뭘 그리 많이 사는가 싶었는데 스쳐 지나가는 차량만 가끔 마주하는 길을 며칠 동안 달리다 보니 다행이다 싶다.
팔랏카의 분수와 사원. 주변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
마가단을 200㎞ 정도 남겨두고 앗카라는 도시를 지나치게 됐다. 도시도 도로 건설과 관련 있다. 콜리마대로 건설을 위해 마가단을 출발해 이곳으로 들어오던 긴 트랙터 행렬은 이곳 주민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길게 늘어선 트랙터 행렬’이라는 러시아어 표현에서 ‘앗카’란 도시명을 따왔다. 도로 건설이 한창이던 1950년대 3000명 가량이던 주민은 현재 10분의1인 약 300명에 불과하다.
콜리마대로에서 식당을 만나기 쉽지 않아 길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
마가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
어건주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
콜리마대로 주변의 다른 도시들처럼 팔랏카도 도로 건설을 위해 설립된 도시다. 이 지역 소수민족 예벤인들의 말로 ‘돌투성이’를 의미하는 ‘팔랴아트칸’이라는 강 이름에서 도시 이름이 유래했다. 하지만 ‘텐트’를 의미하는 팔랏카라는 러시아어에서 이 도시의 명칭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로 건설 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된 텐트가 많이 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팔랏카는 ‘분수의 도시’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곳엔 몇 개의 분수만 있다. 팔랏카는 러시아 기네스북에 2014년 기준 인구 대비 분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등재됐다. 당시 주민 수는 3999명이었으니, 대략 주민 수 1000명당 분수 1개꼴인 셈이다. 팔랏카는 달랑 분수 4개를 가진 분수의 도시였다.
어건주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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