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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해버린 터전 떠난 사람들 화려한 도시의 유혹에 빠지다 [극동시베리아 콜리마대로를 가다]

입력 : 2018-12-11 03:00:00 수정 : 2018-12-10 2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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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척의 도시’서 ‘분수의 도시’로/폐허 방불케 한 ‘앗카’/마을명 ‘길게 늘어선 트랙터 행렬’ 뜻/콜리마대로 건설때의 풍경 짐작 가능/
소련 시절 받던 다양한 혜택 없어져/사람들 열악한 환경 못 견디고 떠나
야고드노예에서 한 시간가량 달려 콜리마강에 도착했다. 콜리마대로와 같은 이름의 강이다. 이 지역 역사는 콜리마강 개발과 관련 있다. 그래서 도로도 지역도 콜리마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콜리마강은 마가단주에서 발원해 사하공화국을 거쳐 동시베리아해로 흐른다. 콜리마강을 가로질러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현대식 다리가 놓여 있다. 도로와 광산이 개발되면서 채굴된 금을 운반하기 위해 다리 건설이 필요했다. 콜리마강의 첫 다리는 1937년 5월에 완공됐다. 기존 다리 옆으로 나란히 건설된 현재의 다리는 2015년 9월 개통됐다. 옛 다리의 흔적은 새 다리와 나란히 서있는 교각뿐이다. 30분 사이에 이 다리 위를 지나간 차량은 화물차 한 대가 유일했다. 긴 겨울 혹독한 추위 외에도 콜리마대로가 비포장도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듯싶다.

강가에는 새로운 다리 건설을 기념하는 상징물이 서 있다. 교각 모양의 상징물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어 주변 경치가 제법 눈에 들어온다. 멀리 데빈 지역이 보인다. 그곳에는 북동교화노동수용소의 중앙병원이 있었다. ‘콜리마 이야기’의 저자 바를람 샬라모프가 병원에서 치료 후 보조의로 근무하기도 했다. 병원을 토대로 데빈에는 한때 의과대학이 설치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수수만, 우스티네라, 팔랏카 등 주변 도시에서 의사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전체 주민 수가 6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로 전락했다.

앗카 지역은 부서진 건물들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이 공존한다.
일정상 데빈을 들르지 못한 채 콜리마강을 떠났다. 한참을 달려도 도로 주변으로 인적은 나타나질 않는다. 가끔 지나치는 도로 분기점만이 그 길의 끝에 또 다른 인간의 흔적이 있을 거란 짐작을 하게 해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개울가에 차를 세웠다. 어디를 가도 날파리와 모기들이 극성스럽게 달려든다. 이들의 습격을 피해 식사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현지 운전사들의 능력이 경이롭다.

거의 매일 점심을 길에서 해결하니 노상의 식사가 더는 어색하지 않다. 익숙하게 빵과 햄을 썰고 청어 통조림을 따고 버터를 상자에서 꺼낸다. 누구는 물을 끓여 컵라면을 준비한다. 콜리마대로 출발점인 니즈니베스탸흐에서 구입한 물과 식품이다. 그때는 뭘 그리 많이 사는가 싶었는데 스쳐 지나가는 차량만 가끔 마주하는 길을 며칠 동안 달리다 보니 다행이다 싶다. 

팔랏카의 분수와 사원. 주변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콜리마강 주변은 아름드리 큰 나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키 작은 관목들만 듬성듬성 눈에 띈다.

마가단을 200㎞ 정도 남겨두고 앗카라는 도시를 지나치게 됐다. 도시도 도로 건설과 관련 있다. 콜리마대로 건설을 위해 마가단을 출발해 이곳으로 들어오던 긴 트랙터 행렬은 이곳 주민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길게 늘어선 트랙터 행렬’이라는 러시아어 표현에서 ‘앗카’란 도시명을 따왔다. 도로 건설이 한창이던 1950년대 3000명 가량이던 주민은 현재 10분의1인 약 300명에 불과하다.

콜리마대로에서 바라본 앗카는 쇠락한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고 방치돼 폐허로 변한 건물과 일부 주민들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공존하고 있다. 콜리마대로를 따라가며 많은 버려진 집들을 볼 수 있었다. 소련 시절에 이 지역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많은 급여와 다양한 혜택을 받았다. 혜택의 대부분이 사라진 지금 열악한 생활환경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나은 삶을 찾아 대도시로 떠나고 있다.

콜리마대로에서 식당을 만나기 쉽지 않아 길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팔랏카에 이르자 콜리마대로의 상태가 변했다. 비포장도로가 사라지고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쇄석과 자갈로 다져진 비포장도로의 노면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비가 온 도로에서는 진흙이 튀었고, 메마른 도로에선 자욱한 흙먼지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마주 오는 차량이 남기고 간 흙먼지 속에서, 앞서 가는 차가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서 불의의 사고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현지인 운전자는 앞의 차를 추월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팔랏카에 이르러 포장도로에 올라서면서 여정 내내 가지고 있던 큰 두려움 하나를 덜어낼 수 있었다.

마가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아트카를 떠나 저녁에 팔랏카에 도착했다. 고위도 지역이어서 거리는 낮처럼 환했다. 콜리마대로의 종착지인 마가단에서 80㎞ 정도 떨어진 팔랏카는 인구수 3700명의 소도시다. 도시 분위기는 여태 지나친 칙칙한 회색빛 도시들과는 달랐다. 밝은 색으로 산뜻하게 칠해진 아파트와 다양한 거리의 조형물,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는 잘 정비된 유럽의 도시를 연상케 했다.

어건주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도시 분위기가 화려한 것은 이 지역 한 유력인사의 힘이었다. 사업가이자 마가단 주의회 의원이 지역 예산을 끌어오고 모자란 부분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도시 정비 사업을 했다. 그 결과 건물들은 산뜻한 색으로 채색됐고, 거리는 각종 조형물과 분수로 장식됐다. 이 도시 주민들은 자신의 도시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이 도시의 밝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얼마 전에 마가단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콜리마대로 주변의 다른 도시들처럼 팔랏카도 도로 건설을 위해 설립된 도시다. 이 지역 소수민족 예벤인들의 말로 ‘돌투성이’를 의미하는 ‘팔랴아트칸’이라는 강 이름에서 도시 이름이 유래했다. 하지만 ‘텐트’를 의미하는 팔랏카라는 러시아어에서 이 도시의 명칭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로 건설 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된 텐트가 많이 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팔랏카는 ‘분수의 도시’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곳엔 몇 개의 분수만 있다. 팔랏카는 러시아 기네스북에 2014년 기준 인구 대비 분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등재됐다. 당시 주민 수는 3999명이었으니, 대략 주민 수 1000명당 분수 1개꼴인 셈이다. 팔랏카는 달랑 분수 4개를 가진 분수의 도시였다.

어건주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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