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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흘러갔어도… 상처 입은 역사는 여전히 아프다

입력 : 2018-11-27 06:00:00 수정 : 2018-11-26 20: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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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치 박해 기억 간직한 ‘야고드노예’ / 1994년, 주민이 ‘기억박물관’ 세워 / 강제수용소 굴라크 각종 유물 전시 / 거리 곳곳 파이고 퇴락한 건물 많아 / 비 내리는 날씨에 스산한 기운 더해 / 2차 대전 승리 기념 전쟁공원은 화려 / 박해 희생자 추모비는 외딴 곳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수수만을 뒤로하고 야고드노예를 향해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이날 안으로 야고드노예와 팔랏카를 거쳐 마가단 시내까지 먼길을 달려야 한다. 이른 아침 수수만 풍경은 잔뜩 낀 운무로 우중충했고 시커먼 진흙탕 길에 으스스한 빈집들이 많아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야고드노예로 가는 콜리마대로를 따라 나타나는 버려진 도시와 고갯마루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분홍바늘꽃(러시아어로 이반 차이)이 적막하고 단조로운 길에 지친 마음을 위안한다.

쇠락한 수수만의 삭막한 풍경에 그나마 한 가닥 빛을 던져준 것은 선명한 색깔로 칠해진 아파트 건물 외벽이다.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산뜻하게 색칠한 수수만의 아파트 건물이 나타났다. 아파트 외관이 화사하게 바뀌면서 그 안의 남루한 삶도 함께 개선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풍경 변화라도 없으면 지독히 단조롭고 생기 없는 오지 시베리아에서의 무료한 삶을 견뎌내기는 정말 어려울 듯싶다.

현대식 콜리마대교 바로 옆에 1953년 건설된 옛날 다리의 교각이 서 있다(사진 위). 강제노동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한 작가 바를람 샬라모프가 5년간 강제노역하며 살았던 야고드노예 데빈 마을 풍경. 겉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스탈린 시대 끔찍한 정치 박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야고드노예로 가는 길의 금 채굴 현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금을 캐느라 마구 파헤친 길과 강, 산 사이로 검은색 흙더미 산이 끝없이 펼쳐진다. 가던 길 중간에 빨간색과 노란색, 파란색 건물들이 나타났다. 1500㎞ 이상 콜리마대로를 달리면서 이처럼 선명한 색깔의 건물이 벌판에 서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금 채굴 현장의 건물치고는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삭막한 콜리마대로에서 마주한 한 폭의 풍경화 같다.

야고드노예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30분쯤이다. 수수만에서 야고드노예까지 거리는 105㎞로 2시간가량 걸렸다. 도로 사정이 좋았다면 1시간 정도면 충분했을 터였다. 야고드노예의 첫인상도 수수만에서 받은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리 곳곳이 움푹움푹 파여 있었고 퇴락한 건물이 많았다. 마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일부 지역은 쓰러지고 부서진 건물이 적지 않아 폐허처럼 보였다. 빗줄기가 멈추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여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소련 시절 러시아 영화감독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영화 ‘스토커’처럼 대폭발 이후의 분위기가 감도는 듯했다.

현지 식당에서 약간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야고드노예 지방 청사를 찾았다.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을 만나 청사 맞은편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직전까지 야고드노예에서 받은 음울하고 후줄근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해 최근 조성된 ‘전쟁공원’으로 우스트-네라에서 본 화려한 ‘승리광장’의 축소판 같았다. 야고드노예 전쟁공원은 콜리마대로 건설 과정에서 자행된 정치 박해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전쟁 승리를 부각시킨 장소다.

전쟁공원에 이어 방문한 정치 박해 희생자 추모비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조성돼 있는 모습에서 이들이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 한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공원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조성돼 있지만, 정치 박해의 기억을 위한 장소는 도시나 마을 중심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숨겨져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한디가에서 마가단까지 콜리마대로 주요 도시와 마을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박해 희생자 추모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조성된 야고드노예의 정치 박해 희생자 추모비.
2차대전 승리 기념 전쟁공원 야고드노예의 쇠락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산뜻한 느낌을 주는 전쟁공원.

야고드노예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 탄생한 현대 러시아에서 정치 박해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기억의 박물관’이 가장 먼저 생긴 곳이다. 1994년 야고드노예에 ‘기억의 박물관’을 세우고 강제노동수용소 ‘굴라크’의 각종 유물을 수집해 전시하기 시작한 사람은 이곳에서 위생설비 기사로 일하던 ‘이반 파니카로프’라는 평범한 주민이었다. 25년 정도 흐른 지금 파니카로프는 정치 박해의 기억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연구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값진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그의 박물관은 1994년 조성 당시나 지금도 그의 아파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박해의 기억이 그의 박물관을 통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세력의 간섭이나 방해 때문이라고 한다.

이반 파니카로프가 여행을 떠났기에, 야고드노예에서 직접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야고드노예에서 발걸음이 엇갈려 아쉽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 제공한 자료, 정보는 파니카로프와의 만남 못지않게 소중했다.
라승도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야고드노예는 ‘굴라크’의 산증인 작가 ‘바를람 샬라모프’가 재판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나중에 ‘콜리마 이야기’를 발표해 굴라크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한 샬라모프는 1943년 야고드노예에서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콜리마강을 끼고 있는 인근 데빈 마을에서 1946년부터 1951년까지 5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최신식 콜리마대교를 건너기 전 바라본 데빈 마을의 모습은 밝고 평화로워 보였다. 깨끗한 마을의 풍광만 봐서는 이곳이 혹독한 정치 박해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현대식 콜리마대교 바로 옆에 1953년 건설된 옛날 다리의 교각이 굳게 서 있는 것처럼 박해의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승도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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