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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자소설 쓰는데 안되나요?" 취준생 절박함 파고드는 자소서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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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1-05 06:00:00 수정 : 2018-11-05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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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권 대학교 졸업예정자로서 이번 가을 처음으로 취업에 도전한 이모(27)씨는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본인 딴에는 기업들이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를 거짓 없이 솔직하게 써냈다고 생각했지만, 이씨는 자신의 자기소개서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고 생각한단다. 서류통과 비율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 우여곡절 끝에 중견기업 한 군데에 최종합격하긴 했지만, 이씨는 그간 목표했던 업무분야가 아니어서 취업재수를 택하기로 했다.

학점이나 토익, 봉사활동 등 나름 스펙을 갖췄다고 생각했기에 좌절하고 있던 이씨의 주변 친구들은 “그렇게 솔직하기만 한 자기소개서는 이제 어필이 안된다. ‘자소서 대필’이라도 받지 그랬냐”며 충고했다. 이씨는 “서류 전형 준비할 때도 그런 충고를 한 친구들에게 ‘자소서 대필이 얼마나 쪽 팔리냐. 난 내가 살아온 과정에 자신 있다’라고 큰 소리쳤는데...내년 봄 공채시즌에는 나도 자소서 대필을 좀 받아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보다 스펙도 그리 뛰어나지 않고 대외활동 등 다양한 경험이 부족한 친구가 괜찮은 대기업에 취업한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는 자소서 대필에 백만원 이상을 썼다던데, 진짜 효과가 있긴 있나보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직박람회'에 참석한 구직자들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반기 공채가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자소서 대필의 효과’와 ‘과연 자소서를 대필을 받는 게 형평성에 어긋나는가? 법적으론 문제가 없더라도 도덕적일까’ 등에 대해 취업준비생들의 갑론을박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언급되고 있다.

과거 취업시장에서 취준생들은 자기소개서보다는 학점이나 공인영어 성적, 봉사활동, 인턴십 경험, 해외 어학연수 등 이른바 ‘스펙’에 더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공기업과 대기업들이 스펙과열 양상을 막고자 각종 스펙을 보지않는 이른바 ‘블라인드’ 방식의 채용 기조를 확대하면서 스펙보다 자기소개서의 비중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10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자소서 대필이 더욱 성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스펙은 수치화할 수 있는데 반해 자기소개서는 뚜렷한 평가 기준을 알 수 없어 ‘준비하기 더욱 막막하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취준생들도 많다.

포털사이트에는 ‘자소서 대필’이란 검색어만 쳐도 찾아볼 수 있는 업체가 10곳은 족히 넘는다. 취준생이 대거 가입한 취업정보카페에는 ‘자소서 대필’ 홍보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자소서 대필 업계에서는 대필업자들을 ‘작가’라 부른다.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란 우스갯소리가 진짜 현실이 된 셈이다.

자소서 대필료는 조건에 따라 다양하다. 대부분 업체에서는 자소서 한 두장짜리를 10~30만원을 부른다. 비싼 곳은 200만원 짜리도 있다. 대필 수준도 기본 첨삭만 해주는 코스부터 전문 작성 등 가격에 따라 다양한 코스가 취준생들을 유혹하고 있다. 안 그래도 경제사정이 빠듯한 취준생들에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가격이지만, 워낙 취업난이 심하다보니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자소서 대필을 맡기는 취준생들이 많다. 자소서를 대필해서 지원한 기업에 합격해 다니고 있다는 회사원 이모(29)씨는 “처음엔 ‘과연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너도 나도 하는 분위기다 보니 편승하게 됐다. 물론 떳떳하진 않다. 그렇다고 큰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학원에 다니듯이 글솜씨가 좀 떨어지면 대필을 받을 수도 있는 것 아닌다. 대필받은 자소서 내용이 내 경력이나 경험 등을 토대로 쓴 거니 모조리 다 거짓말도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취준생들은 ‘대필을 받을 수만 있다면 받고싶다’라는 반응이다. 2016년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취준생 881명 등 1235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자소서 대필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자는 41%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35.8%)보다 많았다. 응답자의 25.2%는 ‘기회와 비용이 있다면 대필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15.8%는 ‘작성 능력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대필해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취준생이 직접 작성한 자소서를 첨삭하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전문을 써주는 것은 합법을 벗어난 불법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크다. 취업준비생 김씨는 “요즘 우리 또래들의 가장 큰 화두는 ‘공정성’이다. 돈만 있으면 경험이나 경력도 포장할 수 있다면 그게 과연 공정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제를 없애려면 채용하는 측에서 대필을 딱 알아볼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씨 말대로 기업들도 자소서 대필 논란에 자체 검열 시스템을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 SK그룹은 SK그룹은 인공지능 분석을 통해 자소서들의 유사도를 분석한다. 첨삭이나 대필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결국은 자신이 주로 쓰는 어휘나 문장 등 편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유사한 문장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겨냥한 것이다. 한 대기업 채용 담당자는 “대필로 써낸 자소서로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 채용과정은 심층면접이나 압박면접 등으로 구직자들의 인성이나 도덕성, 임기응변 등 다양한 측면을 테스트한다. 그 과정에서 기본 자료가 바로 자소서인데, 대필한 자소서를 낸 지원자는 다양한 면접과정에서 꼬리를 밟히게 되어 있다. 소신대로, 솔직하면서도 자신만의 특색을 드러낼 수 있는 글쓰기로 자소서를 작성하는 게 정답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자소서 대필업체들이 서류전형 통과 등 취준생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보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준생 입장에서는 비싼 돈 줘가며 대필했다가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더라도 그 비용을 전혀 보상받을 수 없는 셈이다. 여기에 대필업체 대부분은 ‘합격 후기’나 신춘문예 당선 경력, 기자·방송작가 경력 등을 내걸고 홍보하는데 대부분 사실 확인도 불가능하다. 한 대필업체 관계자는 “어떤 업체도 합격이나 사후서비스(AS)를 약속하는 곳은 없다”며 “창작 행위의 특성상 한번 서비스가 이뤄지면 환불은 안 된다”고 말했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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