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의약품 점자표시 기계 만들지만 안쓰고 수출하는 한국…제조단가 때문에”

관련이슈 스토리 세계

입력 : 2018-11-04 09:00:00 수정 : 2018-11-02 19:23:49

인쇄 메일 url 공유 - +

[스토리세계-11∙4 한글점자의날①] 의약품 점자표기
시각장애인 김훈(47)씨는 16년 전 녹내장을 앓은 이후 3개월에 한번씩 안약을 처방받고 있다. 김씨는 약국에 들러 4가지 안약을 구입하지만 이 약들을 사용할 때마다 불안감에 휩싸인다고 한다. 구입하는 약에 점자표기가 돼 있지 않아 약의 이름, 용량, 부작용 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약을 사용하면서도 혹여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알도리가 없다.

김씨는 2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겨울에 안구건조증 때문에 연고를 넣는데 약의 생김새가 무좀연고, 피부연고와 비슷해 헷갈릴 때가 있다”며 “연고를 잘못 넣으면 안구적출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불안하고 두렵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약에 점자표기가 안 돼 있으니 보관 장소를 다르게 한다든가 손으로 감지하는 등 기억력을 이용해야하는데 약 상자가 다 비슷해 일일이 기억하기 쉽지 않다”며 “매번 남의 손에 맡길 수도 없어 좌절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 시각장애인에겐 깜깜이 의약품…“점자 없어 불안하다.”

박인범(23)씨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가 있는 박씨는 약품을 살 때마다 약사에게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묻지만 설명서를 직접 읽지 못해 불안함을 거둘 수 없다. 박씨는 통화에서 “어떤 약은 3시간 안에 다시 뿌리는 걸 자제하라, 다른 약은 1주일에 몇 회 이상 이용하지 말라는 등 주의사항이 있지만 설명서를 읽지 못하니 답답하다”며 “문제가 생겨도 오남용을 해 부작용이 났는지, 그런 개념자체를 모르고 지나간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은 의약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김씨처럼 후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이들은 항생제 등 안약을 평생 처방받아야하고, 사람이나 물건에 부딪친 상처로 연고를 사용하는 경우도 잦다.

그렇지만 상당수 의약품에 점자가 표기되지 않아 시각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좌절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필수적인 문자체계인 점자가 의약품, 건강보조식품 등에 제대로 사용되지 않아 불편은 물론이고 커다란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다. 의약품 사용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시 오용으로 인한 안전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한 의약품 점자표기 의무화 법안이 매년 국회에서 발의되고 있지만 번번히 좌절되고 있다.
◆ 의약품 점자표기 권장사항에 불과, 제대로 된 점자표기도 10여개뿐

현행법은 의약품의 용기나 포장에 제품의 명칭, 효능효과, 용법용량 등의 사항을 기재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점자 표기의 경우 권장사항일 뿐 의무화가 아니여서 많은 의약품 제조사들이 단가절약을 위해 점자표기를 외면하고 있다. 그나마 점자표기를 하고 있는 업체조차도 규격과 품질이 제각각이라 시각장애인들은 의약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지난해 국립국어원이 공개한 ‘점자표기 기초조사’에 따르면 의약품점자표기 조사대상이 된 91개 품목의 의약품 중 59개 의약품은 점자표기가 돼 있지 않았다. 나머지 32개 중 제대로 점자표기가 돼 있는 의약품은 10개에 그쳤다. 연구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연구원 3명은 10개 의약품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답했다. 점자표기가 돼 있다하더라도 점자규격, 재질, 유지관리상태 등 정해진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도 지난 2015년 전체 일반의약품 1만5781개 품목에 대한 점자표기를 조사한 결과, 점자가 있는 의약품은 52개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장은 통화에서 “의약품에 점자표기가 없어 시각장애인이 오남용을 했다는 사례가 많다”며 “의약품을 섞어놓게 되면 어떤 약인지 알 수 없고 제대로 복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된 점자표기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 의약품 점자기계 만들지만 안 쓰고 EU로 수출하는 한국 “국내선 강제사항 아니라...”

유럽연합(EU)권 국가의 대부분 의약품에는 점자표기가 돼있다. 표기 형태도 규정돼 시각장애인의 의약품 접근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같이 의약품 용기에 점자를 새기기 위해선 별도의 프레스기계(로또브레일)가 필요한데 이를 생산하는 업체는 국내에 있다. EU 국가에 점자 기계를 수출하는 국내업체 ‘에이스 기계 기술연구소’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의약품 점자 기계 생산 기업이다.

점자 기계를 만드는 회사가 우리나라에 있지만 정작 국내 의약품에는 제조단가를 이유로 점자가 보급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함진석 에이스 기계 기술연구소 차장은 “국내에선 의약품 점자표기가 강제사항이 아니라 대부분 표기하지 않고 있으며 하는 곳도 인식률이 떨어진다”며 “인식률이 떨어지는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제조단가를 낮추기 위해서다”고 지적했다. 함 차장은 “유럽은 표기형태와 인식률에 대한 규정이 정해져 있다”며 “기계 공정을 한번 더 거치기에 인식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 의약품 점자표기 법안은 10년째 국회에 계류 중

국회도 의약품, 건강기능식품의 점자표기를 위한 법안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18대부터 20대 국회까지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상비의약품에 대해 점자표기를 하자는 법안이 발의되고 있지만 계류하다가 폐기되곤 했다.

지난해에도 정의당 윤소하 의원 등 10명의 의원이 의약품에 점자표기, 음성변환용 코드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건강기능식품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계류된 상태다.

윤 의원은 법안을 발의하면서 “약사의 처방 없이 구입할 수 없는 안전상비의약품이나 소비자가 직접 구입하는 건강기능식품의 경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정보제공이 중요하다”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보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도 의약품에 대한 점자표기 시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영일 조선대 교수(특수교육)는 2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의약품 오용에 대한 우려를 계속 제기하고 있고 관련 법안, 각종 연구보고서도 나오고 있지만 기업의 비용 문제로 변화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점자는 장애인들이 의약품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고, 관련 기계를 우리나라에서 수출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안하고 있다”고 의약품 점자표기의 필요성과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이들 슈화 '깜찍한 볼하트'
  • 아이들 슈화 '깜찍한 볼하트'
  • 아이들 미연 '깜찍한 볼하트'
  • 이민정 '반가운 손인사'
  • 이즈나 정세비 '빛나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