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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 언제까지?…무민세대의 외침 '대충 살자' [S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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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0-27 11:00:00 수정 : 2018-10-28 00: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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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에 지친 청년들 조금은 대충 살면 안되나?/남들처럼? 나답게! 무민세대의 외침 / SNS서 '대충 살자' 시리즈 큰 인기 / 막막한 현실속 '소확행' 찾으며 위안
#1.직장인 최선정(31·여·가명)씨는 얼마 전 카카오톡 프로필에 ‘대충 살자, 귀가 있어도 관자놀이로 노래 듣는 아서처럼’이라는 글이 적힌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애니메이션 ‘내 친구 아서’의 주인공인 땅돼지 아서가 귀가 아닌 관자놀이에 헤드셋을 끼고 있는 사진이다. 최씨는 “처음에 이 사진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며 “지인들도 한 번쯤 봤으면 해서 프로필 사진으로 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2.서울의 한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박수민(20·여·가명)씨는 요즘 틈날 때마다 트위터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한 주 남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아서 사진과 비슷한 사진들을 찾아보며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다. 그는 서양 음악가들이 그린 높은음자리표를 비교한 ‘대충 살자, 베토벤 높은음자리표처럼’과 ‘대충 살자, 걷기 귀찮아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북극곰처럼’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청년들 사이에서 ‘대충 살자’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초부터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 유행처럼 번진 이 시리즈는 수많은 신작을 양산하며 최근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26일 각종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앞선 사례에 등장하는 사진들 외에도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씨가 서로 높이가 다른 흰색 양말 한 쌍을 신은 사진과 함께 올라온 ‘대충 살자, 양말은 색깔만 같으면 상관없는 김동완처럼'이나 배우 황정민씨가 머리에 풍선을 끼고 찍은 사진이 담긴 ‘대충 살자, 숫자 풍선 들기 귀찮아서 머리에 낀 황정민처럼’ 등 다양한 패러디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위로에서 자조·해학으로… 청년 언어의 변화

대충 살자 시리즈가 청년들의 공감을 얻게 된 이유는 뭘까. 같은 20∼30대라도 대충 살자 시리즈를 소비하는 이유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대학생 박수민씨처럼 “그냥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울 소재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준혁(32·가명)씨처럼 “직장 상사들에게 ‘내가 대충 살고 싶다’는 걸 은근히 알리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렇지만 청년 세대가 이 시리즈에 열광하는 이유가 말 그대로 ‘대충 살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다. 최선정씨는 “한 번도 대충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대충 살자 시리즈를 보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열심히만 살아온 것 같은데, 완벽하지 않은 사진이나 상황들을 보면 ‘조금은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 조금 위안이 된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대충 살자 시리즈가 청년 세대의 새로운 언어라는 분석을 내놨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대표되는 위로 담론과 달리 대충 살자 시리즈는 젊은이들의 자조나 해학에 가깝다고 봤다. 구 교수는 “요즘 청년들은 몇 년 전 청년들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며 “부조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풍자 등의 방식으로 꼬집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는 대충 살자 시리즈를 두고 “열심히 살아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얻어낸 게 결국 ‘생존’뿐이란 걸 깨달은 청년들이 자신을 경쟁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작은 행복이라도 찾으려 하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최 교수는 또 “먹방(먹는 방송)이나 여행처럼 소소한 데서 얻는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이란 단어가 유행한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치열한 삶에 지친 ‘무민 세대’, 즐거움을 찾다

대충 살자 시리즈와 궤를 같이 하는 또다른 단어는 ‘무민 세대’다. 없다(無·무)와 의미(Mean·민)란 단어의 합성어인 무민은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치열한 경쟁이나 열심히 살기를 거부하고, 성공에 대한 강박과 기대를 버린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무민 세대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지상명제처럼 자리잡아 온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올해 초 취업포털 사람인이 성인남녀 11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30 세대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무민 세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20대는 그 비율이 47.9%, 30대는 44.8%였다. 무민 세대가 된 이유로는 ‘취업, 직장생활 등 치열한 삶에 지쳐서’(60.5%·복수 응답)란 응답이, 무민 세대의 등장 원인으로는 ‘수저계급 등 개선 불가능한 사회구조’(57.4%·〃)가 가장 많았다.

무민 세대가 마냥 무기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충 살자 시리즈가 진짜 대충 살자고 하는 게 아니듯,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정우 교수는 “대충 살자 시리즈는 ‘희망 없음’과 ‘있음’을 동시에 내포한 표현”이라며 “요즘 청년들은 과거 세대에 비해 매사에 훨씬 노력을 많이 하는만큼 ‘참여’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중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는 “대충 살자 시리즈에서 ‘대충 살자’는 건 인생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을 유지하자는 말”이라며 “직장 일이나 즐겁지 않은 일은 대충 하더라도 자신이 정말 즐길 수 있는 것, 즉 취미나 여가 활동은 즐길 때 제대로 즐기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조금은 대충 살아도 생존 가능한 사회 돼야”

그러나 아직까지는 청년 세대의 암울한 현실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30 세대에겐 여전히 ‘N포 세대’(취업, 결혼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란 꼬리표가 붙어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0년 전인 2008년 7.4%였던 20대 청년실업률은 2011년 8.7%, 2014년 10.2%, 지난해 11.3% 등으로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젊은이들의 취업 실패는 연애와 결혼, 출산 등의 포기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대충 살자 시리즈의 유행 기저에 깔린 청년들의 아우성에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택광 교수는 “대충 살자 담론에는 대충 살아도 살 수 있을 정도로 국가가 개인을 돌봐 달라는 복지제도에 대한 요구가 숨어 있다”며 “따라서 대충 살자 시리즈는 단순히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띄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일부이지만 대충 살자 담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솔직한 말로 정말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건 극히 일부의 경우”라면서 “우리 사회가 기울인 노력에 비해 거둘 수 있는 결실이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청년들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얘기하기보다는 ‘노력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

최종렬 교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물론 청년 개개인이 진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마저 대충 하면 안되지만 적어도 생존이나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은 충족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이어 “청년들이 대충 살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 나아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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