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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선] 흩어진 왕실 유물 복원 의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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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0-04 21:32:07 수정 : 2018-10-04 21: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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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태항아리(왕족의 태를 담아 묻은 항아리)가 파헤쳐진 건 일제강점기였다. 전국의 길지에 왕실 번영, 국가 안녕의 염원을 담아 소중히 묻은 것이었으나 일부가 도굴 피해를 보았고, 1930년 일제는 안전한 보관을 빌미로 태항아리를 모두 파내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에 모았다. 당시 일제는 일부를 빼돌려 자기들이 세운 이왕가박물관에 보관했는데 광복 이후에는 소장처를 바꿔가며 전전했다. 박물관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인수인계가 엉망이었고, 세트로 태항아리의 한 몸을 이루는 내·외 항아리, 태지석, 뚜껑 등이 각기 흩어져 행방도 모른 채 수 십년을 보냈다.

국립고궁박물관(고박)은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을 준비하며 흩어진 태항아리의 소재를 확인했다. 성종 태항아리는 서삼릉에 묻혔던 내항아리와 태지석이 고박에, 외항아리와 별도 뚜껑은 각각 국립민속박물관(민박), 국립중앙박물관(중박)에 있었다. 인성대군(8대 임금 예종의 장남)의 것은 내·외 항아리는 고박이, 뚜껑은 중박이 소장 중인 게 확인됐다. 특별전은 이들을 한데 모아 80여 년 만에 태항아리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강구열 문화체육부 차장
태항아리가 겪은 ‘이산의 아픔’을 돌보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지난달 2일 특별전이 끝나고 성종·인성대군의 태항아리는 고박, 중박, 민박 각각의 수장고로 다시 흩어졌다. 일제의 만행이 단초가 되었고, 우리의 무관심과 부주의가 더해져 심각한 지경이 된 태항아리의 아픔을 치유할 계기가 마련됐지만 원형 복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시작된 게 없다.

참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문화재 보존, 관리의 시작은 원형이다. 작은 흠집만 나도 난리가 나고 현대적 활용 등을 고민할 때도 원형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태항아리는 애써 원형을 찾아놓고는 다시 찢어놓았다. 원형 회복에 대한 논의조차 없다. 소장처가 달라 흩어진 것을 한 곳에 모으기가 어려운 일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사립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면 소유권 등의 문제가 걸려 논의가 복잡해질 수 있지만 고박, 중박, 민박은 모두 국립기관이다.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태항아리를 어느 박물관이 소장할 것인가라는 점이 논란이 될 수 있지만 고박으로 정하는 게 상식적이다. 왕실 유물로 특화된 곳이고, 태항아리의 소재를 확인한 곳이기도 하다.

각 박물관 관계자들은 원형 복원 필요성에 공감했다. 다만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나는 태항아리가 흩어지는 과정 역시도 존중해야 할 역사일 수 있는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태항아리 같은 사례가 적지 않은 만큼 소장처 간 유물 이전과 관련해 보다 세밀한 방식을 만들기 위해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수긍하긴 힘들어도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역시도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보다 신속하고, 쉽게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특별전은 6월 27일 시작해 9월 2일 끝났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태항아리의 원형 복원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그러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태항아리를 온전하게 되돌리려는 의지가 있기는 한 걸까.

강구열 문화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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