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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년 만에 프랑스서 경매물로 등장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입력 : 2018-09-18 14:00:00 수정 : 2018-09-17 21: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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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국내 귀환 2017년 6월 7일, 필자는 해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 정보를 검토하다 깜짝 놀랐다. 프랑스 경매사의 아시아미술 경매에 올라온 유물 사진 때문이었다. 가지런히 엮은 대나무 위에 글씨를 새기고 위아래로 황금색 변철을 덧댄 그것은 죽책(竹冊)이 분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시도록이라면 모를까 경매도록에 매물로 실릴 유물이 아니었다.

조선 왕실은 왕에게 존호·시호·휘호를 올릴 때나, 왕비·왕세자·왕세자빈을 책봉할 때에 책(冊)을 제작했다. 대상이 왕이나 왕비이면 옥으로 만든 ‘옥책’(玉冊)을, 왕세자와 왕세자빈이면 대나무를 재료로 죽책을 만들었다.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는 황제, 황후를 위한 ‘금책’(金冊)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들은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종묘(宗廟)에 봉안됐다. 따라서 죽책은 왕실 밖으로 유출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고, 민간에서 사사로이 비슷한 물품을 만들거나 사용하지 않았으니 죽책이 고미술 시장에 나타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1819년 풍양조씨를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으로 책봉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지난해 프랑스의 한 경매사에 출품된 것이 확인돼 국내로 환수해 왔다.
◆1759년 결혼 관련 문서(?), 죽책의 정체 추적

경매사는 이 죽책이 어떤 유물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경매도록의 죽책 사진은 여섯 면 중 두 면만 펼친 것으로 백자, 목가구의 사진과 함께 한 페이지에 싣고 있어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죽책의 성격과 가치를 알았다면 죽책 한 점만으로 여러 페이지를 할애했을 것이었다. 제목은 ‘여섯 페이지의 필사본’으로 달았고, ‘1759년 결혼 관련 문서’라는 간략한 설명이 달려 있었다.

경매사에 요청해 좀 더 선명한 사진을 받아보니 죽책에 새겨진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기묘년에 조씨를 왕세자빈으로 봉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죽책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일단 경매사의 설명대로 1759년 결혼과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이 해에 수여된 죽책으로는 ‘정조 봉왕세손 죽책’(正祖 封王世孫 竹冊)이 있는데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내용으로 결혼과 관계가 없다. 1759년의 가례로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책봉이 있었으나, 왕비 책봉이므로 죽책이 아닌 ‘정순왕후 봉왕비 옥책’(貞純王后 封王妃 玉冊)이 제작되었다. 정조의 죽책, 정순왕후의 옥책 모두 종묘에 있던 것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1759년 결혼 관련 문서’라는 경매사의 설명은 오류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기묘년’을 단서로 1759년 바로 다음 기묘년인 1819년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순조실록의 순조19년 10월 11일자에 기록된 죽책문의 내용과 경매사 사진에서 읽은 내용이 거의 일치했다. 조만영(1776∼1846)의 딸 풍양조씨를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으로 책봉하는 죽책이었다. 효명세자빈(1808∼1890)은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세간에는 ‘조대비’(趙大妃)란 호칭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다른 기록이 있는지도 찾아보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효명세자가례도감의궤’(1819)에 죽책문 전문이 실려 있었는데 경매에 나온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의궤에 실린 죽책의 그림은 경매에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효명세자가례도감의궤’ ‘효명세자가례도감의궤’에는 죽책에 새긴 글의 전문과 함께 모양이 그려져 있다.
◆15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왕실 유물

왕실에 귀하게 보관되어 있어야 할 죽책이 프랑스까지 흘러들어간 사연은 무엇일까.

죽책을 경매에 내놓은 60대 프랑스인은 조부가 구입한 것을 보관해 온 것이라고 했다. 그의 조부인 쥘 그룸바흐는 보석상이자 미술수집가로 1930년대 파리 테부 거리에서 ‘막시마’(Maxima)라는 이름의 상점을 운영했다. 소장자는 조부가 당시 파리 고미술 시장에서 죽책을 구입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죽책이 프랑스로 유입돼 유통되었고, 그룸바흐가 구입한 이후 90년 가까이 대를 이어 그 집안이 소유하다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왕실의 물건이 프랑스로 유출된 것이니 1866년 병인양요와 관계된 것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은 강화도를 침략하여 강화행궁 안에 있던 외규장각에서 의궤 등을 약탈하였다. 철수하기 전 행궁과 외규장각에 불을 질러 건물과 함께 가져가지 못한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모두 잿더미로 만드는 만행도 저질렀다. 약탈품들은 포장하여 프랑스 해군성으로 발송하였고, 그 목록과 수량을 기록하여 보낸 보고서가 파리의 국방역사관에 남아있다.

강화도 외규장각 그림 강화도 행궁에 설치된 외규장각을 그린 그림. 1866년 10월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 해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 등 왕실의 유물을 약탈해갔다.
병인양요와 관련된 기록을 즉시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검토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2002년 논문 ‘외규장각도서의 유래와 병인양요 직전의 소장 상태’에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 소장품 목록과 약탈품, 소실품 목록이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죽책은 병인양요 당시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논문의 근거가 된 ‘정사 외규장각형지안’(丁巳 外奎章閣形止案)을 찾아 다시 확인했다. 형지안은 병인양요가 있기 9년 전인 1857년 조선왕실이 작성한 강화도 외규장각의 봉안물 장부이다. 형지안 맨 첫 장에 이 죽책이 기재되어 있었다.

“왕대비전께서 기묘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의 죽책 하나”(王大妃殿己卯世子嬪冊封時竹冊一)

효명세자빈 죽책은 발견부터 정체 확인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유물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도 그렇다. 죽책을 소실된 것으로 파악했던 이유는 1857년 형지안에는 기록이 있는데 로즈 제독이 작성한 전리품 목록이나 파리국립도서관 소장품 목록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 차장
◆덕온공주 인장까지, 고국의 품에 돌아온 왕실 유물

죽책이 어떤 유물인지, 얼마나 중대한 가치를 가지는지 명확해지면서 우리의 품으로 되가져와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문화재청 등 관계당국과 협의를 시작하였고, 어떻게든 반드시 한국으로 들여와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먼저 법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문화재청과 국제법 전문가 등을 통해 검토한 결과 구입해서 들여오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군이 약탈하여 프랑스 정부의 소유로 있다가 정부 간 협상을 거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하고는 사정이 달랐다. 병인양요 당시 유출된 것으로 의심되지만, 직접적인 반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고, 이미 오래전 시장에서 유통되어 개인 소유물로 전해지고 있었다.

매입으로 방향을 정하면 우선 재원이 문제가 됐는데 다행히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게임즈의 후원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라이엇게임즈는 그간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 사업에 전폭적인 후원을 해왔고, 문화재 환수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서예, 왕실 유물, 서지, 역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여러 차례의 평가위원회도 열었는데, 진위와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되는 바가 없었다. 마지막 절차인 실물 조사를 위해 2017년 7월 말, 전문가와 함께 파리로 가서 유물을 확인하였다. 의궤에 따르면 이 죽책 역시 다른 것들처럼 글자를 새기고 금니를 칠했다고 하는데 사진상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었다. 현미경으로 살펴보니 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지에 덮여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힘 있는 서체와 유려한 조각은 실제로 보니 더욱 빼어났다. 왕실을 위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와 명필이 쓰고 최고의 장인이 완성한 명품의 아우라는 사진으로 보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현지 출장 전에 상세한 협의와 검토가 진행되었던 터라 실물 확인 후 바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남은 것은 프랑스 정부의 문화재 반출 행정절차를 거쳐 죽책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일이었다.

2018년 1월 20일, 죽책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발견부터 귀환까지 8개월이 걸렸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일일이 밝히기야 어렵지만 국내에서 공개된 이후 많은 분들의 격려를 받을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죽책 환수에 이어 지난 5월에는 미국 경매에서 매입에 성공한 ‘덕온공주 동제인장’이 국내로 돌아오는 경사가 있었다. 두 유물 모두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덕온공주(1822∼1844)는 효명세자의 친동생이다. 프랑스와 미국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집으로 다시 불러들여 만나도록 한 것 같으니 뿌듯함이 참으로 컸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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