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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군불 땔감으로 아궁이서 사라질 뻔 했던 보물 ‘겸재화첩’

입력 : 2018-09-11 06:00:00 수정 : 2018-09-10 21: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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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6〉 근대 한국 문화재 지킴이들 / 친일파 송병준 머슴이 태우려던 화첩 / 골동상 장형수가 불사르기 직전 구해 / ‘간송’ 전형필이 수장할 수 있게 만들어 / 1930년대 무지한 문화재 인식 보여줘 / 월북 함석태와 종적감춘 ‘금강산연적’ / 60여년 지나 北 국보되어 일반에 공개 / 후지쓰카, 日로 가져간 김정희 ‘세한도’ / 손재형, 두 달간 매일 문안해 되찾아와 “… 사랑채 한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처넣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아마 무식한 머슴이 군불 땔감으로 휴지며 뭉치를 안고 나올 때 잘못 섞여 나온 거겠지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란 말이에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으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골동상 장형수가 1933년에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겪은 일이다. 장형수는 겸재화첩을 송병준의 손자에게서 사서 전형필의 서화 수집창구 역할을 하던 한남서림의 이순황에게 보여 주었고 이순황은 전형필이 수장하도록 중개했다. 겸재화첩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전하고 있는 보물 제1949호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다. 이 일화는 친일파들이 얼마나 부유했고 또 많은 미술품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근대기에 소중한 미술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근대의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의 개탄에서도 비슷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신사조에 대한 갈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서…가가호호 전래의 진귀한 책과 기이한 보배는 휴지값, 개값으로 팔아 치우고 하는가 하면”이라며 새로운 것에의 관심이 커질수록 과거의 것들을 돌보지 않게 된 세태를 꼬집었다.

옛 유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모은 수장가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하다. 이들이야말로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집을 시작할 때의 의도와 달리 어렵게 수집한 유물이 흩어지거나 없어지는 운명에 처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정선의 ‘해악전신첩’에실린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해악전신첩의 사연은 일제강점기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실감케 한다.

◆60여년 만에 북한의 국보로 재등장한 금강산연적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함석태(1889∼?)는 일본 유학 후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되었다. 서울시 중구 삼각동에 개업한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라는 명예로운 기록 외에 ‘소물진품대왕’(小物珍品大王)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많은 고미술품을 소장하였다. 그러나 함석태의 소장품 가운데 사진으로나마 전해지는 것은 ‘조선고적도보’(1935)의 도자기 15점, ‘조선명보전람회도록’(1938)에 수록된 회화 4점에 불과하다. 근현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수장가의 소장품들이 그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많은데 함석태의 소장품 역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함석태는 특히 ‘금강산연적’을 지극히 아껴 어딜 가든 반드시 휴대하고 다녔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탈 때 일본 형사에 의해 추궁을 당했지만 여러 번 왕래하는 동안에 소문이 나서 금강산연적만은 검사를 받지 않을 정도로” 그의 금강산연적에 대한 애정은 유명했다. 1944년 가을 함석태는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세 대의 차에 나눠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황해도 해주를 거쳐 월남하려다 실패한 이후 함석태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육로를 택하면 충분히 월남할 수 있었지만 해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고미술품을 가져오려다 실패한 듯하다. 결국 미술품 사랑이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금강산연적은 그 이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2006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녘의 문화재’ 전시회에 북한의 국보 ‘진홍백자금강산모양연적’으로 출품되었다. 없어진 것으로만 여겨졌던 국보급 문화재가 당시의 남북화해 분위기에 따라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금강산 모형 연적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가 가장 아꼈던 ‘금강산연적’은 해방 직전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에 ‘진홍백자금강산모양연적’이란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목숨 걸고 모은 문화재 일시에 흩어지기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수장가들은 일본인들과 재력 면에서 차이가 컸기 때문에 값비싼 물건은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장택상과 전형필은 일본인에 맞서 귀한 물건을 많이 수집했다. 장택상은 특히 “도자기 수집의 권위”로 유명했다. 그러나 장택상의 수장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인해 그의 경기도 시흥, 노량진에 있던 별장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시흥에서 벌어진 전투로 그의 별장에 보관했던 숱한 유물이 사라졌으며, 노량진 별장에 둔 많은 미술품도 직격탄을 맞아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장택상의 남은 수장품은 그가 이승만과 맞서기 위한 활동에 나서면서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처분하는 바람에 곳곳으로 흩어졌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는 추사 김정희를 청나라 고증학의 완성자로 높이 평가했다.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는 당시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가 소장하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을 거쳐 후지쓰카가 갖게 되었다.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1940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갈 적에 가져갔는데, 이 사실을 추사 작품 수집가로도 유명한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손재형은 미군 공습이 한창인 도쿄에 가서 생면부지 후지쓰카에게 세한도 양도를 요청했다. 후지쓰카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두 달간 매일 문안인사 드리며 부탁하는 손재형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마침내 후지쓰카는 손재형이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다며 건네주었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인수한 지 석 달 뒤인 1945년 3월 10일, 후지쓰카의 연구실은 공습을 받아 많은 서적과 서화가 불타고 말았다. 손재형의 노력에 의해 세한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손재형은 195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자신의 소장품인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김홍도의 ‘군선도’ 병풍 등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가 결국 빚을 갚지 못해 이들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모두 국보로 지정된 명품들인데 세한도 역시 저당 잡혔다가 개성 갑부 손세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손재형은 자신의 손을 떠나게 된 세한도를 보며 목숨 걸고 현해탄을 건너가 직접 가져온 찬란한 기억을 아프게 회고했을 것이다.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는 손재형이 목숨을 걸고 일본에서 가져온 작품이다.

◆문화재 유출 막은 수장가들의 공로 기억해야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소홀히 다룬 송병준가와 심지어 불쏘시개로 쓰려고 했던 머슴, 폭격을 피해 평안북도 영변까지 자신의 수장품을 가져갔다가 결국 수장품 때문에 월남에 실패한 함석태, 6·25전쟁으로 인하여 소중한 작품의 대부분을 날려버린 장택상, 목숨 걸고 도쿄까지 가서 일본인 학자의 양보를 통해 가져온 세한도를 저당 잡혀 넘겨주고만 손재형까지 근대 한국의 미술품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 전수되었음을 보았다. 우리의 근대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일상적인 생활은커녕 생존마저 위협받을 정도로 곡절이 많은 시기였음을 수장가와 그들이 수집했던 미술품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골동가에서 “골동이란 바람기 있는 기생 같은 것”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골동은 태생적으로 돈에 휘둘리기에 머무를 곳을 알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결국 골동의 운명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고미술품의 수장에 대하여 부정적 느낌을 주는 이와 같은 표현이 사용된 원인은 우리나라 근대 이후의 골동품 수장과 거래가 도굴·밀매·밀반출·위조 등으로 점철된 탓이 크다. 그렇지만 미술품과 미술시장 그리고 수장가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미술품은 민족의 문화역량과 미의식의 총화이고 미술시장은 미술품이 유통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재산을 기울여 문화재를 지켜낸 수장가들의 노력 역시 길이 조명될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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