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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바람, 바람,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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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9-07 22:30:55 수정 : 2018-09-07 22: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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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 불어오는 갈바람에 / 폭염에 지친 심신 되살아난 듯 / 한반도에 번지는 평화 바람도 / 세계로 퍼져 전쟁 사라졌으면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를 떠올린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렇다. 지난여름 폭염에 시달렸던 지친 몸과 마음을 불어오는 바람 속에 맡기고 있노라면 저절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친김에 어릴 적 배웠던 동요도 불러본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의 식은땀을 씻어준대요.” 그렇다. 어떤 바람은 노동의 고단함과 영혼의 괴로움을 씻어주고 살고 싶다고, 살아야겠다고 노래하게 한다.

반면에 강풍과 폭우를 동반해 집과 담장을 무너뜨리고 도로와 전기를 끊어버리고 항공기를 결항시키고, 땀 흘려 가꾼 농작물과 공동체가 지키고자 한 문화재를 파괴하고, 심지어 사람의 목숨마저 빼앗아 가는 무시무시한 바람의 위력 또한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난달 한반도를 휩쓸고 간 제19호 태풍 ‘솔릭’만 보더라도 제주지역에 19억2100만원의 재산 피해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갔으니 그 바람은 ‘나쁜 바람 포악한 바람’이라고 불러 마땅하리라.
안현미 시인

이렇듯 살다 보면 똑같은 바람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 나무꾼의 이마를 닦아주는 고마운 바람이 되기도 하고, 삶을 파괴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포악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국면에서는 딱히 특별한 도움을 준 것도 아닌데 누군가에게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국면에서는 아무 해코지도 안 했는데 우리의 존재만으로도 상처를 주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어 누군가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김수영의 시 ‘풀’이 떠오른다. ‘바람’과 ‘풀’을 대립관계에 놓고 ‘눕다’ ‘울다’ ‘일어나다’를 반복해 가다가 종래에는 풀이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노래하는 그의 마지막 시. 다른 이견과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수영의 풀을 바람(시련)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가녀리지만 부드러운 힘을 가지고 있는 ‘풀(민중)’의 메타포로 읽고 싶다.

올해는 김수영 작고 50주기를 맞는 해이다. 문학계를 비롯해 각계에서 그의 50주기를 기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영어영문학과에 1945년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시인에게 모교인 연세대는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했고, 1981년 초판 출간 이후 시 63쇄, 산문 47쇄를 중쇄하며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김수영 전집’이 시인의 50주기를 기념해 시와 산문을 발굴하고 미발표 작품을 보태어 ‘김수영 전집1·2’로 다시 새롭게 출간됐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모더니스트 대표 시인으로 회자된 김수영의 시와 삶을 ‘자유와 혁명과 사랑을 향한’ 리얼리스트 시인으로서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한 ‘리얼리스트 김수영’도 출간됐다. 11월에는 김수영 50주기 기념 학술제와 시민과 함께 하는 기념 문화제도 준비되고 있다고 하니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인 우리 민초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한반도에 불고 있는 평화의 바람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부디 그 바람이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로 널리널리 불어가 정녕 핵 없는 평화의 시간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나그네의 코트를 벗기는 것은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라는 이솝 우화 속의 교훈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할 때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던 김수영의 말처럼 ‘평화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이 분다. 함께 살아야겠다.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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