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밀어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해 /45년간 부검해온 법의병리학자인 저자
빈센트 디 마이오, 론 프랜셀 지음/윤정숙 옮김/소소의책/1만7000원 |
“실체가 드러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편견과 언론의 프리즘을 통해 먼저 결론을 내린다.”
미국 법의병리학자 빈센트 디 마이오(Vincent Di Maio)와 작가 론 프랜셀의 말이다. 두 사람은 45년간 9000여 건을 부검하고 2만5000여 건의 죽음을 조사한 베테랑이다. 사람들은 통상 스스로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는 사이 진실은 왜곡되고 뒤틀려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저자들은 역사적인 의문사 사건들의 퍼즐을 맞춰 나가면서 독자들을 왜곡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네덜란드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은 의문투성이다. 고흐는 정신질환을 앓다 37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파리 근처 작은 마을 여인숙에 머물렀다. 그림에 매진하던 어느 날 권총으로 자기 옆구리를 쏴 자살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이다. 후대 화가들이 이를 묘사한 그림도 상당수 전해진다. 귀 잘린 그림 등 고흐의 정신이상을 상상해 그린 그림들이다.
저자 빈센트 디 마이오 박사는 법의학적 증거들을 토대로 고흐의 타살설을 입증해 낸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저자는 2012년 흑인 청년 사살 사건이 백인 경찰관과의 우발적인 충돌로 빚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이제껏 고흐 주변의 유명한 화가들은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해왔다. 왜 그랬을까. 무미건조한 진실보다는 천재 화가에게 걸맞은 극적인 죽음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흐의 타살설이 제기된 직후, 2011년 네덜란드 일간지에 실린 논평은 이런 세태를 보여준다.
“빈센트 반 고흐가 두 귀를 모두 갖고 명예를 누리며 1933년 80세 노령으로 죽었다면 결코 오늘날처럼 신화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키프로스와 밀밭보다는 고흐의 정신질환, 우울증, 실수, 귀 절단, 자살이 훨씬 더 그의 내러티브, 신비감, 불가해함에 잘 맞아떨어진다.”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수많은 자화상 가운데 ‘귀 잘린 자화상’(1889· 유채화)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런던 코톨드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
2012년 초 인종 갈등에 불을 댕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10대 흑인 청소년 마틴 트레이본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지머맨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짜여진 각본처럼 인종차별 논란으로 비화했다. 흑인 지도자들은 인종차별을 외쳤고 순식간에 130만명이 지머맨 체포를 요구하는 데 서명했다. 많은 블로거와 자칭 전문가들은 TV에 나와 범죄 전문가가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정체불명의 법의학 이론들이 무수히 등장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거들었다. “트레이본 마틴은 35년 전의 나일 수도 있다. 내게 아들이 있다면 트레이본처럼 생겼을 것이다”라고 말해 인종차별 논란을 확산시켰다. 시위꾼들은 살인자를 아무런 처벌 없이 교도소에서 풀어주는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법’의 폐지를 요구했다. 사건 실체를 들여다보니 언론 보도나 시위꾼들 주장과는 달랐다. 흑인 청년을 살해한 게 아니었다. 우발적으로 충돌이 벌어졌으며 정당방위였음이 재판 과정에서 규명된 것이다. 두 사람의 과잉 대응으로 일어난, 불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과학적 증거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은 진실을 들려주었다. 정치인들은 언필칭 이 사건을 흑백 문제로 확장시켜 논쟁했지만 백해무익이었다.
저자들의 이야기는 시종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면서도 교훈적이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에 얽힌 음모론, 1980년대 사이코패스 연쇄유아살해 간호사 제닌 존스 사건 등을 소개하면서 진실을 규명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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