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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공부로 사회를 이롭게”… ‘그림자 봉사’ 펼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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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20 21:03:52 수정 : 2018-07-20 21: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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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史 권위자 임계순 한양대 명예교수 “미국 유학 시절 대학원생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던 맹인 여학생이 학위 논문 작성을 도와준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어요. 아니 맹인이 어떻게 글을 고치나? 그 학생이 장애를 극복하고 학문을 하는 자세에 큰 감명을 받고 용기를 얻었어요. 맹인이나 지체장애인 동료들과 지내다보면 장애인들도 보통 사람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한번 실천해보세요.”

여성 학자로는 드물게 중국 역사(청사)로 박사학위(일리노이주립대)를 받은 임계순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73)의 유학 경험담 한 토막이다. 임 명예교수와 서울 서초동 연구실에서 만나 2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이어갔다. 

옆집 아주머니 같은 후덕한 면모를 지닌 임계순 명예교수는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도 몰라야 한다”면서 “장애인 봉사활동에 결코 나서는 법이 없다”고 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임 명예교수의 인생은 굴곡진 삶은 아닐지라도, 담담하면서도 소탈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장애인을 돕는 활동에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다. 뒤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는 모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의인’이란 이런 삶이란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유학 시절 그 친구에게서 받은 감동은 지금도 진하게 다가온다. 귀국 후에는 가톨릭계 복자수녀회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중국동포(조선족)나 세터민 같은 우리 사회 어려운 이웃들에게 보다 애착을 갖고 있다.”

얼핏 역사학자와 사회 봉사활동은 짝이 맞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기에 노력했다. 훗날 ‘사랑의 빛 ― 저소득층 맹인의 일상생활(1989·가톨릭출판사)’,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2003· 현암사)’ 등의 책을 써서 그들의 삶을 세상에 알렸다.

“미국의 장애인을 위한 사회 시설이나 인식은 우리와는 아주 달랐다. 장애에 상관없이 똑같이 생활하고 대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 거주 시설에 뛰어들어 같이 울고 웃을 수 있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전공한 역사학 역시 사회를 이롭게하는 공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임 명예교수는 세계적인 청사 전공 학자로서도, 장애인을 돕는 사회사업가로서도, 세 아들을 잘 키운 어머니로서도 열심히 살았다. 첫눈에 옆집 사는 수수한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지식인의 풍모와 번뜩이는 안광은 나이들수록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의 이력을 보니 남자 교수들이 지배하는 중국 역사학계에서 첫 여성이라는 직함이 즐비했다.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젊어 보이는 면모였다.

임 명예교수는 1999년 각 일간신문에 소개되면서 한때 유명해졌다. 그 까닭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결코 평범한 사례는 아니다. 이를테면 세 아들 결혼식을 하면서도 간소하게 치를 만큼 올곧은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전문지식 쪽으로 옮아갔다. 임 명예교수는 “중국 역사 공부는 나의 시대적인 사명으로 여긴다”고 강조했다.

―중국사를 공부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이화여대 사학과에 입학한 직후 외삼촌은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려면 중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중국사를 전공하려면 중국어, 한문은 물론 일본어를 꼭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려고 중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일러주었다. 대학 1학년부터 일본어와 중국어를 익혔고 대학교 3학년부터는 청명 임창순 선생한테 한문을 사사받았다.”
옆집 아주머니 같은 후덕한 면모를 지닌 임계순 명예교수는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도 몰라야 한다”면서 “장애인 봉사활동에 결코 나서는 법이 없다”고 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청나라 팔기주방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

“1969년 유학 길에 올라 일리노이대(어배나섐페인 캠퍼스)에서 중국학으로 저명한 로이드 이스트먼(Lloyd Eastman) 교수의 지도로 8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역사학계에선 처음으로 만주족이 창안한 핵심 통치술의 하나인 ‘팔기주방’ 논문을 썼다. 2001년에는 ‘마르퀴스 후즈후’(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에 등재되었다. 다트머스대 역사교수인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Pamela Kyle Crossley) 교수는 2013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만주족의 역사’의 한국어판 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었다. ‘임 교수는 미국의 청대사 연구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에서 등장한 청조와 팔기제도의 연구전문가들은 임 교수의 작업에 큰 신세를 졌다. 그가 있었기에 미국의 청사 연구는 새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팔기주방이란 무엇인가.

“팔기(八旗)제도는 1601년 누르하치가 독자적인 군 전법으로 창안한 것이다. 호구통계, 징집, 징세, 병력동원을 위한 행정제도인 동시에 국민개병제적인 군사제도였다. 중원 정복과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간략히 줄여 설명하면 무식한 30만명(만주족)이 유식한 1억5000만명(한족)을 지배한 진법이 팔기주방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는 대표적인 정복왕조로서, 베이징에 천도한 1644년 이후 268년 동안 중원을 지배했는데, 이를 무력으로 뒷받침한 게 팔기였다. 내 논문이 나온 지 10여년 후에야 베이징 인민대학에서 팔기주방에 관한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청조가 중국 25왕조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청조는 가장 오랫동안 팍스시니카를 이룩한 왕조다. 1670년대 1억5000만명의 인구를 1850년 4억3000만명으로 늘렸고, 국토와 민족 구성 등에서 현대 중국의 모양을 결정한 왕조가 바로 청조였다. 청조는 뛰어난 컴프러마이즈(절충) 능력을 갖췄다. 정치, 사회 세력 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룬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수립하여 유연성 있게 운영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국가운영을 실천하고 있지 않는가.”
―‘중국의 미래 모델 싱가포르’라는 저서를 최근 출간했는데.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은 1978년 11월 싱가포르 방문 당시, 경제 건설과 엄격한 사회질서와 통치에 큰 감명을 받았다.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 1000개가 건설되기를 희망했다. 예컨대 1979년 광둥성 선전과 주하이, 1980년 광둥성 산터우와 푸젠성 샤먼을 각각 경제특구로 지정해 해외 자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어 싱가포르 부총리를 지낸 고켕스위(Goh Keng Swee)를 1985년부터 중국 국무원 경제고문으로 초빙해 싱가포르의 경험을 전수받았다. 1992년 개방 선두지역으로 떠오른 선전에서 ‘싱가포르를 배우자 싱가포르를 따라잡자’는 기치를 내걸었다. 싱가포르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싱가포르 모델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중국 곳곳을 답사했다고 들었다.

“땀 흘리며 중국 현지를 답사했다. 장쑤성 쑤저우 공업단지도 가보았다. 쑤저우공단은 산업과 도시가 성공적으로 융합 발전한 모범 사례가 되었고, 중국인이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가 되었다. 빠르게 세계화한 쑤저우공단의 성공은 싱가포르 경험의 중국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국 각지로부터 25만명 이상의 중국 관리들이 쑤저우공단에서 공부했다.”

―시진핑 주석은 ‘리콴유 따라 하기’를 한다는데.

“가만히 보니 사실이었다. 2012년 집권했을 당시 시작한 반부패운동은 싱가포르를 본보기로 한 것이다. 시진핑은 사회제도와 법치를 중시한다. 리콴유 정치를 따라 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인민행동당이 모델이었다. 인민행동당 역시 수십년 집권하면서 일당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역시 흡사한 경로를 걷고 있지 않는가.”

―중국이 동아시아 정세안정에 기여하는가.

“시진핑의 중국의 꿈(中國夢)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다. 과거의 중화질서 회복을 의미한다. 중국은 미국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부추겨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고 본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은 한반도를 미국과 일본의 세력을 막아주는 방패로 생각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세력 균형을 이루고자 할 것이다.”
―지금 미·중 대결이 무역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데 결론은.

“무역전쟁의 ‘무기’가 충분하다고 자신하는 트럼프는 밀어붙이기 식으로 가고 있다. 물론 미국이 다양한 측면에서 유리하지만… 중국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 같다. 자칫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까 염려스럽다. 만약 이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미국 내 정치적 변수로 인해 트럼프에겐 어려워질 수 있다. 인내를 요구하는 국제적 대결에서 민주주의 국가는 중국과 같은 집단주의 권위주의 국가에 승리한 사례는 드물다.”

―이 시대 젊은 후학들에게 하고픈 말씀은.

“중국에는 공산당 당원이 8000만명 이상이다. 중국 엘리트가 8000만명 이상으로,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은 인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살아움직이는 거대한 싱크탱크가 아닌가. 여기에 대응해야 하는 우리는 보다 개방적이어야 한다. 선배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연구결과가 나오도록 상호 협력하는 학풍이어야 한다. 지금 같은 폐쇄성으로는 어렵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이뤄져야 한다. 신뢰 없는 (정부)정책과 결정은 무의미하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임계순 명예교수는

△1944년 충남 논산 출생 △67년 이대 사학과 졸업 △81년 일리노이대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84년 한양대 사학과 교수 △2004년 한양대 인문과학대학장,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소속 복자학원 이사 △2006년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장 △2010년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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