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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국민국가’만 살아남은 까닭은…

입력 : 2018-07-07 03:00:00 수정 : 2018-07-06 20: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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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선 제국·도시국가·수도회 등/ 다양한 통치 모델이 국가적 형태로 존재/ 전쟁 반복하며 효율적 준비·수행에 최적/‘국민국가’ 역할 확인… 위상 강화되고 조직화/ 유럽 통치체 식민지·정복 통해 비유럽 확산
찰스 틸리 지음/지봉근 옮김/그린비/2만9000원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990~1992년/찰스 틸리 지음/지봉근 옮김/그린비/2만9000원


러시아 월드컵에서 보듯이 축구경기가 과열되었다. 특히 유럽 각국 국민들의 표정에서 드러난 실망과 분노, 열광을 보면, 스포츠라고 하기엔 너무 격렬하고 전투적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은 마치 전쟁에 나서는 전사처럼 비장한 각오가 TV화면을 통해 가감없이 전달된다. 스포츠를 통한 유대감 증진이라는 FIFA 명분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국민 정체성을 대변하는 ‘대리전쟁’처럼 느껴지곤 한다.

‘21세기 사회학 창시자’로 추앙받는 미국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21세기 국민국가들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다. 적지 않은 한국인 제자도 길러낸 노학자의 혜안이 빛나는 책이다. 이 책은 고전 반열에 오를 만큼 많이 읽하고 있다. 원제목은 ‘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AD 990-1992’. 저자가 아직 생존했다면 광적으로 열광하는 전쟁 같은 축구경기를 어떻게 해석할까.

저자의 분석 대상은 기본적으로 유럽이다. 현재 지구 모든 곳에 편재한 국가 체제는 990년 이후 제대로 그 형태를 갖추었다. 그후 5세기가 지나면서 그 지배력은 유럽 대륙 외부로 뻗어나갔다. 유럽 제국은 모든 경쟁자를 흡수하거나 퇴색시키거나 멸종시켰다. 여기에 희생된 나라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터키가 중심이 된 국가들이었다.

일찍이 강력한 국민국가를 형성한 프랑스, 아일랜드 등의 지역 통합에 분투했던 영국,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의 흔적에서 탄생한 독일, 아프리카와 동아시아, 남미 등 거의 모든 나라가 이 범주에 속한다.

1648년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80년전쟁과 독일의 30년전쟁을 마감한 유럽 최초의 국제적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은 오늘날 유럽 국민국가 형성의 시초로 일컬어진다. 유럽 각국은 각종 조약을 통해 전쟁 발발을 방지하고 있다. 사진은 베스트팔렌 조약 서명 후 승전국 대표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세계일보 자료사진
과거에는 국민국가 이외에도 많은 통치모델이 존재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제국, 도시국가, 도시 연합, 지주 네트워크, 교회, 수도회, 해적 연맹, 전사 집단 등 다양한 유형의 통치체들이 기능했다. 그들은 국가적 형태를 가진 엄연한 주권체였다. 때로는 지리적으로 겹쳐지는 가운데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흥망성쇠를 겪었다. 하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오직 국민국가뿐이다. 저자는 지난 1000년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한다. 유럽과 여타 대륙들이 국민국가라는 형식을 일사불란하게 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 핵심을 전쟁으로 풀이한다. 전쟁 그 자체 혹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피하려는 준비와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전쟁 준비에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라는 점이다. 힘없는 제국은 쪼개져 여러 개의 국민국가가 되었고,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는 도시국가는 국민국가에 병합되었다.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시발점은 30년 전쟁의 종전협상이었던 베스트팔렌 조약이었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강화되고 조직화되었다.

최근 ‘국민이라는 자격 조건’에 대해 배타성이 강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불거지는 난민문제는 단적인 사례다. 국민국가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폭력성과 강제성이 내재된 강력한 집단체가 되었다. 틸리는 지난 500년간 나타난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이 잘 정리된 국경과 상호 관계로 연결된 국민국가를 구성하였다. 둘째, 유럽의 체제가 실질적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셋째, 힘 센 국가들이 보다 약한 국가들의 조직과 영토에 증가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세 가지 변화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유럽의 열강들은 비유럽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화, 정복, 침투를 통해 그 체제를 활발하게 확산시켰다. 국제연맹과 이어진 국제연합의 창설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단일한 국가 체제 안에서 조직화하는 것을 비준하고 정당화했다.

2018년 현재 유엔 가입국 수는 193개. ‘독립적 주권국가’이자 국민국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나라 수가 193개국이라는 의미다. 국가에 대해 저자는 “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된 자치 가능한 구조를 방편으로 다양한 인접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국가”로 풀이한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종과 민족, 문화적 차이가 엄존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국민국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국경선으로 구획된 국민국가는 강력하게 작동하며 개인의 삶을 규율한다. 대부분의 개인은 때때로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구획된 정체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정교하게 기획, 관리된 제도의 틀 속에 포함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럽 각국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건과 경향을 치밀하게 그려내면서, 21세기형 국민국가를 생각해낸다. 저자는 바람직한 국민국가 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한 채 2008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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