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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어진 정치와 의술이 만든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임진왜란의 상처 씻다

입력 : 2018-06-23 15:08:52 수정 : 2018-06-23 15: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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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허준과 선조의 '동의보감'/ 임진왜란 발발로 인명피해 극심하자/ 선조, 태의 허준에 의술서 편찬 명해/ 전란 소용돌이에도 14년 만에 완성/ 국가 편찬사업으로 ‘애민 의서’ 탄생/“의서가 사람 잡는 책이 돼선 안된다”/ 무려 3년 동안 감수·교열 거쳐 발간
임진왜란 초기 전투 기록 임진왜란 개전 초기 동래성에서의 전투를 담은 ‘동래부순절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죽고, 다치면서 의학서의 필요성은 그만큼 컸다.
◆동의보감, 인간애에 바탕을 둔 국가적 편찬사업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1596년 선조는 태의(太醫) 허준(許浚)을 불러 의서 편찬을 명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선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고, 의약이 없어 요절하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술(仁術)과 인정(仁政)의 시작이라 믿었다.

선조의 애민정신은 허준으로 하여금 의술보국(醫術報國)의 사명감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허준은 유의(儒醫) 정작을 비롯하여 태의 양예수·김응탁·이명원·정예남 등을 스태프로 삼아 편찬에 들어갔고, 꼬박 1년 세월을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형식과 내용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의 여파는 동의보감 편찬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대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편찬 작업도 난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뜻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 일을 이룬다(有志者 事竟成)’고 했던가. 전란의 소용돌이도 선조의 뜻과 허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선조는 다시 허준을 불러 혼자서라도 편찬을 완수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고, 궁중 소장 의서 100여권을 참고 도서로 내려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군신 상호간의 공감과 소통은 역경을 헤쳐나가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허준은 피난을 다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심지어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는 와중에도 연구와 편찬에 전념하여 마침내 1610년 8월 동의보감 25책을 완성했다.

이렇듯 동의보감은 1596∼1610년 전후 14년에 걸친 역정 끝에 탄생했고, 거기에는 임금과 한 신하의 집념과 끈끈한 동포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사의 명장면임에 분명했다.

비록 선조는 두 해 전 세상을 떠났지만 허준은 백성을 사랑하고, 또 자신을 믿어준 선왕의 배려에 감사했고, 광해군 또한 부왕을 대신하여 그에게 격려의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숙마(熟馬) 1필을 특별히 내린 것은 그런 마음의 작은 표현이었다.

광해군은 전교를 내려 동의보감 편찬을 축하하고, 허준의 공을 치하했다.
태의 허준 선조의 명을 받은 허준은 전란의 와중에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했고, 유배를 가서도 편찬 작업을 이어갔다.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하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라.”(‘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8월 6일)

◆철저한 내용 확인, ‘동의보감 TF’ 3년간 감수하다

동의보감의 편찬이 마무리되자 간행 및 배포로 이어졌다. 지금도 우리는 임상시험에 들어간 어떤 획기적인 의약품이 빨리 시판되기를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7년 전쟁으로 몸과 마음 모두가 성치 못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동의보감의 간행과 보급은 의학적 구세주의 출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찬물을 줄 때는 나뭇잎을 띄워 급하게 마시는 것을 경계하게 했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또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의서에 실리는 약명과 처방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잡는 책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내의원에 ‘동의보감 간행 TF팀’이라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무려 3년 동안 전문가의 철저한 감수와 교열을 거쳐 1613년 비로소 초판본을 간행했다.

1613년 내의원에서 발행한 초판본 부수는 이제 알 수 없다. 하지만 1635년 무렵 동의보감을 다시 인쇄해야 한다는 요청이 쇄도했던 것으로 보아 한정판으로 발행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 현존하는 초판본은 모두 3종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왕실도서관 역할을 했던 장서각에 소장된 초판본은 발행 즉시 왕실에 납본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인지 보존 및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3종의 동의보감 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받고 있으며,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과 대한민국 국보라는 영예로운 이름에도 너무나 잘 부합하고 있다.
동의보감 초판본 1613년 발행된 이후 동의보감은 국내외에서 큰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조선 정부는 세자를 교육하며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중시했다. 사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동의보감 초판본.

◆“중국에서 출판된 조선 서적은 동의보감이 유일”, 국내외 최고의 베스트셀러

동의보감은 간행 직후부터 조선의 신민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책이 되었지만 보급 부수가 제한되어 아무나 가질 수는 없는 귀한 책이었다. 초판된 지 약 20년이 지난 1635년 무렵부터 확대 보급을 위한 인쇄를 요청하는 건의가 그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648년에는 동의보감이 왕세자 교육기구인 서연의 교재로 채택될 만큼 그 중요성은 날로 커져갔다. 세자에게 굳이 동의보감을 학습하게 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중시하는 최고지도자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에 대한 사랑의 배움과 실천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동의보감에 대한 반응은 국내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더 뜨거웠던 측면이 있기도 했다. 특히 중국이 그랬고, 일본 또한 비상한 관심을 보였으니 동의보감은 의학계의 ‘글로벌 이슈’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동의보감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18세기 초반이었던 것 같다.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다른 증정품은 마다하더라도 동의보감만큼은 꼭 챙겨갔다. 이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경종 연간인 1721년, 영조 연간인 1738년, 정조 연간인 1784년·1786년 등의 기록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1738년 사신들은 다른 증정품은 다 사양하고 동의보감과 청심환 50환을 특별히 주문하여 가져갔다고 하고, 1786년에 조선을 찾은 중국 사신들은 23질이나 되는 동의보감을 가지고 귀국했다. 조선의 의학적 깊이와 수준에 대한 인정과 놀라움이 없었다면 이런 현상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선 정부에서 일본에 공식적으로 증정한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동의보감을 반출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이 되면 동의보감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반출대상 ‘3대 서적’의 하나가 되었다. 유학 분야에서는 이황의 ‘퇴계집’이, 역사기록 및 군사·국방 분야에서는 류성룡의 ‘징비록’이, 의학 분야에서는 동의보감이 일본에서 가장 선호하는 조선의 서적이 된 것이다.

중국 사신들이 동의보감을 가져간 것은 의학적 관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차 그것은 의학적 벤치마킹으로 발전해갔다. 사신을 통해 전달된 동의보감의 전문성은 입소문으로 어느새 중원 천지로 퍼져나가면서 구매욕을 부추겼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중국의 출판업자들은 사신들이 가져간 것을 저본으로 하여 판매용으로 출판하기에 이르렀고, 그 수효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우리 관료들이나 상인들이 중국판 동의보감을 구입하여 돌아오는 기현상이 빚어졌을까 싶다.

정조 임금이 남긴 글에는 동의보감의 존재로 인해 가능했던 문화적 자존심이 느껴져서 마음이 흐뭇해진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을 중국인들이 구매하여 출판함으로써 천하에 널리 배포되게 되었다. 중국본 동의보감은 무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많은데, 우리나라 서책 가운데 중국에서 출판된 것은 동의보감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홍재전서)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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