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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75〉 족보는 남녀차별적?

입력 : 2018-06-05 09:00:00 수정 : 2018-06-05 15: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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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문화의 소산’ 족보, 조선후기 유교 폐단에 아들 먼저 기록/ 고려시대 왕건, 성씨·본관 하사 정책 / 중기 이후 비교적 가계 정확히 그려져 / 작성 초기엔 남녀 출생 순서대로 기록 / 조선전기 300년까지 남아선호사상 없어 / 유교적 국제질서 이끌던 명나라 패망후 / ‘小中華’ 의식 팽배 女불평등 더욱 심화 / '남존여비 사상' 우리 고유의 문화 아냐 / 최근 女지위 향상 세태 반영 개선 추세 우리 역사 속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정리하는 연구를 오래 하다 보니, 종종 자신의 본관(本貫)을 찾고 싶다는 문의를 받을 때가 있다. 본인의 이름과 부모, 조부모 등의 이름을 가지고 ‘항렬(行列)’을 유추하여 가능성 있는 본관을 알려주기도 한다. 항렬이란 한 씨족(氏族)이 10대 이상에 걸쳐 각 세대마다 이름에 포함할 글자와 순서를 미리 정해 놓은 글자 목록이다.

항렬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경우 자신의 이름과 항렬을 비교하면 해당 본관에서의 자신의 대수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이름에 ‘구(九)’ 자가 들어 있고 아버지 이름에 ‘용(容)’ 자가 들어 있을 경우, 항렬자를 중(重)-태(泰)-녕(寧)-오(五)-혁(赫)-순(純)-용(容)-구(九) 순으로 하는 성관(姓貫)에 속할 수 있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가계를 모르는 이상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달기는 한다. 자신이 속한 본관과 정확한 계보는 족보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족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이렇게 해서라도 찾는 수밖에 없다.

비공식적으로나마 가계의 훌륭함을 확인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면 더 이상 고민이 필요 없지만, 해당 성관의 족보에 정식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호적, 주민등록등본 등 각종 증빙자료를 갖추어서 종중에 요청하고 확인받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족보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자신과 이어져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존재다. 
판화 ‘민씨가의 규수’ 조선 후기 유교적 폐단이 교조적으로 강화되면서 전통시대의 여성의 ‘남존여비’의 사상에 얽매이게 됐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300여년 동안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상속자였고 족보에서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사진은 엘리자베스 키스의 판화 ‘민씨가의 규수’.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족보에 대한 관심, ‘뿌리찾기’와 ‘이해관계’

족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과거를 잊은 채 열정적으로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고 자신의 뿌리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포함해 다양한 기관에서 개설한 인문학 대중강좌의 참가자들 중에 현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많다는 게 이러한 세태를 반증한다.

다른 이유는 족보와 관련하여 뭔가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족보와 자신의 이해가 걸릴 일이 뭐가 있을까.

최근에 우리 사회는 대규모 부동산 개발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 전통적으로 종중 소유로 전승되어 오던 대규모 토지나 묘역이 공공택지로 수용되기도 한다. 국가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이지만 사유지를 강제로 수용하는 만큼 거액의 보상금이 종중에 지급된다. 그런데 이 보상금은 다른 곳에 비슷한 용도의 토지를 매입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종중 구성원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때도 있다. 보상금을 나눌 때는 해당 종중에 소속된 사람인가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 판단을 위해 사용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족보이다.

여러 가지 확인과정을 거쳐 일단 족보에 등재되면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해당 종중에 참여할 자격이 생겨 종중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도 있고, 자녀들에게 주는 장학금 등 종중이 제공하는 혜택들을 받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 족보에 속한다고 확인받는 것은 경제적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가장 오래된 족보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진 ‘안동권씨 성화보’는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을 기재하고 있어 족보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해체되어 가는 남성 중심의 종중 문화

그런데 족보에 등재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갈등에 휘말릴 때가 있다. 다른 성씨의 집으로 시집간 여성들과 반대로 시집 온 여성들은 남성 종중원들과 동등하게 보상금을 분배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신문을 보면 이와 관련한 논쟁과 법적 분쟁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출가한 여성들은 다른 집에 시집가서 다른 집안의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더 이상 종중원이 아니고, 따라서 보상금을 분배받을 자격도 없다는 주장을 두고 논란이 크게 벌어질 때가 있다. 종중의 주된 역할 중에 하나가 대대로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며, 그동안 제사는 남성 중심으로 모셔왔기 때문에 과거에는 이런 주장들이 힘을 얻었다. 이런 주장에 힘입어 2002년 이전에는 ‘남성 혈통주의’와 ‘출가외인’ 관념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법원 판결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사회적 통념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2005년 대법원은 “종중 회원은 성년 남성에 한한다”는 판례를 깨고 여성도 종중원이 될 수 있음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사회적 인식뿐만 아니라 법규에서도 성년 여성은 종중원으로서 남성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인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법이 사회적 현실을 뒤에서 따라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법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은 이 판결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정착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권 신장은 족보와 호적 등에도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부계혈통 중심으로 호적을 정리하던 호주제도 2005년에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고, 2008년에 새 가족관계등록제도가 시행되면서 완전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중이나 상속 문제와 관련하여 여성을 불평등하게 대하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신장되면서 불평등 문제도 점차 개선될 것이다.
여성 이름도 기록 여권이 신장되면서 현대의 족보는 어머니, 딸 등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로 적은 족보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족보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오늘날의 족보는 옛날 족보와는 어떻게 다를까. 왕건은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고려를 개창한 후 지역별로 할거하는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을 맺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성씨와 본관을 하사하는 정책을 취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본관들의 상당수가 고려시대의 지명을 따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부터 성씨와 본관 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족보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현재의 족보에서 가계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기 시작하는 시기는 고려 중기 이후이다. 그 이전은 계통이 불확실하게 그려지며, 때로는 황당한 것처럼 보이거나 전설과도 같은 내용이 포함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족보는 실물로 전해지지 않고 현전하는 것들은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족보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세대와 가족을 기록할 때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로 기록한 것 같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나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 등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두 족보는 유교가 국가 통치이념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조선 초기와 완전히 정착된 중기에 간행된 것들이다. 이 외에도 17세기에 조종운(趙從耘·1607~1683)이 편찬한 ‘씨족원류’(氏族源流)를 보아도 태어난 순서대로 가족이 기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족보의 남녀차별은 교조화된 유교의 폐단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박사 같은 외국 학자들도 삼국시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 300년까지는 상속을 남녀에게 균등하게 했고, 남아선호사상도 없었으며, 족보도 태어난 자식 순서대로 기록했다고 하여 ‘한국적 평등문화의 소산’이라고 평가했다.
양창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오면서 아들을 먼저 기록하는 불평등한 형태로 변모한다. 병자호란의 고통을 겪은 이후 새로운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동시에 사라져 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의식이 강화되면서 유교적 사회운영원리도 주례(周禮)에 따른 장자상속 방식으로 변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유교적 국제 질서에 따라 사대(事大)하던 명나라가 사라지면서, 이제는 조선이야말로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팽배해졌는데, 여성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소위 말하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아니다. 조선 후기에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강화된 유교적 폐단의 일부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향상된 세태를 반영하여 오늘날 족보는 다시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과거에는 없었던 여성의 ‘이름’도 같이 기록하여 남녀가 평등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몸소 느끼게 한다. 모두가 과거의 낡은 잔재라고 치부해서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는 유물을 눈치 빠른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현실을 보며 족보의 끈질긴 생명력에 새삼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양창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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