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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칼럼] 아이들을 내버려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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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22 21:12:00 수정 : 2018-04-22 2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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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마다 바뀌는 교육제도
그사이 아이들은 훌쩍 커버려
싹트기 쉬운 마당부터 만들고
잡초와 꽃이 공존하게 해야
장 그르니에는 ‘카뮈를 추억하며’라는 그의 에세이집에서 고백한다.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는 다른 많은 이들 중에서도 자신을 가르칠 책임이 있던 사람, 얼떨결에 꿈을 자신에게 전달하게 되었을 뿐인 사람 곁에서 살았다. (…) 우리의 정신 속에 잠재해 있는 얼마나 많은 씨앗이 싹트기 쉬운 상황을 기다려 왔는가.”

또 한 번 바뀌는 교육제도 앞에서 뒷북 행정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교육은 언제 그 제도를 바꿔도 늦은 게 아닐까, 하고. 이번엔 제대로 된 것 같다는 새 제도가 나타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훌쩍훌쩍 커 버리게 마련이니.

강은교 동아대 명예교수 시인
나의 아버지는 식민지 시절에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셨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시고 경성제대에 맞설 만한 우리의 젊은이들을 담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대학 설립뿐이라고 믿으셨던 것이다. 우리의 대학을 꿈꾸던 아버지, 만약 지금 아버지께서 살아 계셔서 오늘의 대학을 비롯한 교육장의 현실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당신이 하신 일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느끼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많은 교육학 박사, 교육전문가들이 있음에도 정권이 바뀌면 과거의 교육은 실패로 규정지어지고 새로 출발하고자 하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의 의견은 아마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민립대학 운동을 말 것을’. 그러시면서 대학은 없어져야 하리라고 말씀하시지나 않으실까, 싶은 것이다.

이쯤 생각하다 보면 다시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바뀌는 제도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상경영을 잘해나가는 것을 보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걸 보면, 그들의 촛불로 잘못된 역사적·정치적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걸 보면 교육이란 결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아마 아버지도 그러한 내 생각에 동의하실 것 같다. 그러면서 말씀하실 것 같다. 가장 좋은 교육은 가만 놔두는 것이라고. 결코 제도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라고. 사회의 모든 것이, 부모의 모든 행동이 결국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밖으로 나오면 안 돼.” “밖으로 나오면 안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것도 몰라요? 선생님이 그랬어요.” 딸이 다섯 살 때 일이다. 묻고 또 물어 그 말의 뜻을 알게 됐다. 즉 당시 다니기 시작한 미술연구소의 선생님이 미술연구소에 가자마자 동그라미를 그리는 연습을 시켰는가 본데, 동그라미 밖으로 색칠한 것이 절대로 삐져나오면 안 된다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원래 딸은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다 그러듯이 커다란 스케치북을 백설공주니, 왕자의 그림으로 가득 채우곤 했다. 그래서 나는 딸이 그림에 소질이 있나보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미술연구소에 가기 시작한 그날부터 딸은 갑자기 의기소침해져서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부터 딸은‘동그라미’에 순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며, 제도로 대표되는 ‘동그라미’ 밖으로 결코 나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순응의 구도 속으로 자기를 던져버렸다고나 할까. 그리고 아마 커갈수록 그런 것을 느끼며, 자기의 아이들에게 만이라도 ‘동그라미’ 밖으로 나올 줄 알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랄까, ‘동그라미에 갇힌 딸’을 보면서 잡초는 결코 뽑기만 할 것이 아니라는 엉뚱한 생각을 나는 하기 시작했었다. 오늘의 수능제도와 교육 현실의 그 많은 제도를 생각하면 수재가 아닌 우리는 모두 잡초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란 제초제 공장인가. 나는 나의 딸이 내가 다음 단계의 학교를 걱정하기도 전에 훌쩍훌쩍 커버리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시구를 썼다. “우리가 기다리는 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참 오랜만에 아버지의 꿈을 꾼다. 아버지가 멀리서 말씀하신다. ‘아이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보다 싹트기 쉬운 마당을 가꾸어라. 잡초와 꽃을 공존하게 하여라. 학교는 제초제 공장이 아니다. 꽃만 키우려는 오늘의 교육에 대해 생각을 바꿔라’라고.

강은교 동아대 명예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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