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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천지인을 관장하다

입력 : 2018-04-19 20:52:47 수정 : 2018-04-19 20: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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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교수 ‘조선 국왕의 상징’서 소개 무학대사는 무너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꿈을 왕이 될 징조라고 해석했다. ‘무너진 집’은 고려를 의미하고 이성계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건 ‘王’(임금 왕)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소재가 된 ‘왕’자의 가로 획은 각각 하늘과 땅, 사람을 의미한다. 가로 획을 관통하는 세로 획을 세워 글자를 완성했으니 왕은 “하늘과 땅과 사람 모두를 관장하는 최고의 지배자”이다.

글자 하나만으로도 확인되는 왕에 대한 어마어마한 기대는 다양한 형태으로 표출되었다. 경북대 사학과 정재훈 교수는 최근 발간한 책 ‘조선 국왕의 상징’에서 천지인(天地人)의 지배자인 왕을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인 상징을 소개한다. 

건국 직후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에 대한 조선의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산물이다. 이 지도의 제작은 조선의 국왕이 천명을 받은 존재라는 관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하늘을 그리고, 읽다

중국에 대해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은 형식상 하늘에 대한 제사, 곧 제천의례를 거행할 수 없었다. 유교의 등급에서 하늘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건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가능하고, 제후는 특정 지역의 산천에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국왕은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보편적이었고, 이는 하늘의 변화를 읽어내는 천문 역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태조 즉위 후 4년이 지난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천문 현상을 12개의 분야로 나누어 차례로 늘어놓은 그림)이 완성됐다. 자체적으로 축적한 데이터를 반영해 건국 직후 이런 천문도를 그린 것은 “조선의 국왕은 천명을 받은 존재로서 중국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왕조를 만들었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하늘에 대한 조선의 관심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천문 기상 관측, 역서(曆書) 제작 등을 담당한 고려의 ‘서운관’을 계승, 발전시킨 ‘관상감’을 운영했다. 그 결과 조선에서 천문역법은 새로운 경지를 갖추었다. 1444년, ‘칠정산내·외편’을 간행해 독자적인 역법을 공식화한 것이다. 정 교수는 “조선의 국왕이 단순한 제후가 아니라 천자와 대등한 존재였음을 상징하는 증거”라고 소개했다. 

영조는 자신이 왕통과 도통을 동시에 구현하였음을 자부함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모색했다.
◆사직제, ‘나라의 근본은 백성, 백성의 근본은 땅’

왕조나 국가를 의미하는 ‘종사’(宗社)는 ‘종묘’와 ‘사직’을 합한 단어다. 이 중 사직은 토지와 곡신의 신을 모신 곳으로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데, 백성은 토지를 기반으로 그곳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살아가므로” 사직은 국가나 다름없었다. 조선은 사직제를 신하들이 지내던 것에서 국왕이 직접 거행하는 형식으로 격상했다.

사직제는 ‘국조오례의’에서 대사(大祀)로 분류된 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제사로 간주되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연이은 가뭄과 전염병 등으로 인해 피폐해진 민생을 구제하는 차원에서 사직단의 기곡제도 대사로 편입되었다. “토지를 소유한 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사직 체계에 민생의 구제와 안정을 기원하는 기능을 추가하였던 것”이다. 

토지·곡신의 신을 모신 사직단에서의 제사는 백성을 근본으로 여겼던 의식의 소산이다.
◆제왕학, 왕에 대한 치밀한 구상

사람의 지배자로서 왕은 ‘제왕학의 교과서’들로 상징화됐다.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주도면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사대부의 정치 참여”라는 일관된 목표 속에서 왕 역시 성리학의 이론 아래 두고 왕을 성인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제왕학은 ‘대학연의’에서 시작했다. 이 책은 절대적 왕권을 전제하는 고려 때의 ‘정관정요’와 달리 왕의 수양법을 담고 있다. 여기서 왕은 “끊임없이 성인, 성왕(聖王)이 될 것을 요구받는 존재”가 되어 군권이 제한됐다.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 왕통(王統)과 도통(道統)의 조화를 중시한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면서 ‘성학집요’가 중시됐다. 사림은 “도통의 기준이 국왕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리학 공부를 통해 도달 가능한 것”이라고 여겼고, 이에 따라 왕은 “사대부 논리의 실현자”로 설정됐다. 왕권의 원초적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자의적인 왕권 행사를 방지하려 한 것이다.

위축되었던 왕권은 ‘군사론’(君師論)이 등장하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탕평 등을 통해 왕권강화를 모색했던 영·정조는 “왕통을 담당한 국왕이 성리학의 도통까지 겸함으로써 이상 군주를 실현할 것”을 자임했다. 이런 생각을 반영한 책이 ‘대학유의’였다.

정 교수는 “제왕학은 왕의 개인적인 학문이 아니었다”며 “지배 이데올로기의 제약을 받으면서 동시에 정치적 동반자였던 신하들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고려됐다”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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