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이 6월3일까지 ‘영국사와 도봉서원’ 특별전을 열어 그 의미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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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터에서 발굴된 금강령과 금강저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 왕실의 후원 아래 크게 번창했던 영국사의 영광을 증언한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971년 고려 광종은 전국의 사찰 중 ‘고달원’, ‘희양원’, ‘도봉원’ 세 곳을 찍어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정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찰은 국가에서 임의로 주지를 정했으나 세 곳만은 특정 고승의 제자들이 주지를 이어가며 기존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도봉원은 영국사의 당시 명칭으로 광종 재위 후반에 국사로 추대된 혜거가 출가 이후 공부한 곳이라 오랜 기간 머물며 제자들을 키웠던 곳이다. ‘나라를 편하게 한다’는 의미의 ‘영국’이라는 명칭에서도 왕실의 지원을 받던 이 절의 위상을 읽을 수 있다.
왕실과 영국사의 관계는 ‘?林公施’(계림공시·계림공이 시주했다)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굽다리 그릇에서도 드러난다. 영국사터에서는 향로, 그릇, 숟가락 등 다양한 불교 금속공예품들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는데, 이 중 하나인 이 그릇을 시주한 계림공은 고려 15대 왕인 숙종이다. 그는 문종 31년(1077)에 계림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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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터에 세워진 도봉서원은 규모와 위상이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맞먹을 정도였다. 주변의 풍광도 빼어나 심사정의 ‘도봉서원도’ 등이 전한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성균관에 버금가는 규모와 위상 도봉서원
조선에서 숭유억불은 건국 이념의 하나였으나 고대로부터 고려까지 한반도를 지배한 종교이자 사상인 불교를 일거에 내몰 수는 없었다. 영국사 역시 세종대인 1448년 즈음 중창되었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 북방개척을 주도한 최윤덕의 아들 최경손 등 지배층이 후원자였던 점 등에 비춰보면 그 영광은 조선초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학의 지배력이 보다 정밀해지고, 강력해지면서 불교가 설 자리는 급격히 좁아졌다. 특히 조광조 이후 도학정치 구현에 철저했던 사림의 지배체제가 굳어지면서 불교의 위상은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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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에 배향된 송시열은 ‘송자’라고 불리며 큰 존경을 받았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건립 당시 도봉서원은 부지뿐 아니라 건축자재까지 영국사의 것을 재활용했다. 도봉서원뿐 아니라 한성부, 황간향교, 소수서원 등이 이 같은 방식으로 세워져 시대의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도봉서원에 배향됐던 조광조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적극적으로 유교 이념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던 인물이고, 송시열은 ‘송자’(宋子)라 불리며 공자, 주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도봉서원은 또 선비들이 풍광을 감상하고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실경산수의 대가인 정선의 ‘도봉추색도’에는 도봉서원과 그 앞을 지나는 계곡이 산과 안개에 둘러싸여 넓게 펼쳐져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심사정의 ‘도봉서원도’도 전해진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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