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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삼고초려’ 임금을 알현한 선비는 사직소로 지조를 지키고…

입력 : 2018-03-26 21:21:48 수정 : 2018-03-26 21: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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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인조와 장현광의 ‘魚水之交’ 어수지교(魚水之交)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다”고 한 유비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사람들은 임금과 신하의 이상적인 만남을 이렇게 비유했다.

왕조국가에서 왕은 절대권력자였다. 모든 권력은 임금으로부터 나왔고, 신민의 생사여탈권도 가졌다. 하지만 독단은 금물이었다. 왕권을 믿고 매사를 오로지 하거나 신료를 경시한 임금의 말로는 비참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파멸은 단적인 사례다.

신료들의 자발적인 협찬(協贊)을 이끌어 내는 것보다 바람직한 지도력은 없을 것이다. 성덕을 지니고 신하를 예우할 줄 아는 임금의 조정에는 곧고 바른 신하가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들을 동반자 삼아 나라를 운영할 때 정치와 민생도 안정됐다.

역사의 교훈이 이러했기에 현명한 임금은 신하를 예우할 줄 알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신하를 애써 붙잡는가 하면, 어진이를 불러 올리기 위해 교통·숙식·호위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것쯤은 다반사였다. 신하가 병들었을 때 어의를 파견하거나 약을 보내는 일도 예우를 표하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임금에게 곧고 어진 신하보다 더한 복은 없고, 신하에게 성덕을 지닌 임금의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에게는 나름대로 믿고 의지하는 신하가 있었다. 태종에게는 하륜, 효종에게는 송시열, 정조에게는 채제공이 있었다. 저마다 임금의 지우를 바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신하들이었다.

성덕 지닌 임금과 기개 지킨 학자 유림을 대표하는 선비로 존경을 받았던 장현광(사진)은 조정에 출사하라는 인조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인조의 산림등용, 장현광에 쏠린 관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역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은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호학의 성품을 타고난 그는 집이 가난하였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일생을 나그네처럼 유랑하면서도 학자로서의 심지가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전란의 와중에 피난을 다니면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인품이 근후했던 얼굴에는 덕기가 만연했다.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율곡의 재능과 여헌의 덕을 합하면 공맹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그의 학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영남 일원은 물론 기호권의 인재들이 모여 여헌문하(旅軒門下)는 점차 학파의 태동을 알리며 한 시대의 학문적 분위기를 크게 고조시켰다.

장현광이 저술과 후학양성에 매진하던 1623년 조선의 정계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몰락하고 서인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흔히 인조반정을 두고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묵인하며, 소북이 조소하는 상황에서 성공한 거사라고들 하는데, 그는 당쟁에 직접 가담치는 않았지만 남인에 속해 있었다.

비록 광해군이 폭군일지라도 반정은 분명 국가의 비상사태였고, 민심도 요동치기 마련이었다. 민심수습이 최우선 과제였던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다 제쳐두고 고심 끝에 남인계 원로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이로써 민심은 점차 안정의 기미를 보였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에 인조는 신망 높은 유림의 대표를 초빙하여 민심을 더욱 진정시키고 정권의 정당성도 함께 천명하고자 했다. ‘숭용산림’(崇用山林) 정책은 이렇게 대두되었다. 산림이란 초야에 은거하여 학덕을 쌓은 고결한 인품을 지닌 선비에 대한 존칭이며, 유림의 수장을 의미했다. 산림 등용은 조정에 청신한 기풍을 일으킴은 물론 유림의 지지를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중요시됐다. 

인조가 장현광에게 벼슬을 주며 내린 명령서(사진 위)와 장현광이 이를 거절하며 낸 사직서(사진 아래)는 어진 신하를 얻으려는 임금과 학자의 기개를 지키고 싶어했던 선비의 만남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거듭된 임금의 요청에 출사한 칠순의 선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현광은 명실공히 유림의 종사로서 인조와 위정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의 등용이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은 인조가 즉위한 지 열 사흘째 되는 1623년 3월26일 경연에서였다. 인조는 등용해야 할 산림이 누구인지를 거듭 물었고, 그때마다 장현광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영남에 장현광이 있는데 초야에서 글을 읽은 사람으로 당세의 고사(高士)라고 합니다.”(인조실록 1년 3월26일)

“학행과 언론이 선비들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니, 장현광을 먼저 발탁하여 등용하면 사람들이 추향을 알게 되어 충분히 고무될 것입니다.”(인조실록 1년 4월3일)

인조는 같은 해 4월13일 사헌부지평 임명장과 부임을 재촉하는 유지를 동시에 내려보내는 한편 경상감사에게는 특별 호송을 지시했다. 석학을 극진히 모시라는 특별 호송 지시는 어명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몸을 일으킬 장현광이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을 쓴 것이었다. 그리하여 채택된 것이 ‘가교(駕轎) 호송’이었다. 가교란 왕과 왕세자가 장거리 행차 때에 사용하던 가마로 일반 사대부들은 상상하기 힘든 고급 교통수단이었으니, 인조가 장현광의 보필을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짐작이 간다.

“내가 전에 잠저에 있을 때 그대가 노성한 숙유로서 오래도록 임하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생각하고 경모함이 마음 속에서 한시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국사를 함께 논의코자 하니, 그대는 가교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장현광에게 내린 인조의 유지)

그러나 장현광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인조의 뜻은 분명 신하된 자로서 감복할 만한 것이었지만 쉽사리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즉시 정중한 사직서를 썼다. 사직서가 제출되면서 인조의 기대는 무산되었지만 난진이퇴(難進易退·벼슬에 나갈 때 신중히 결정하고, 그만둘 때는 신속히 한다)를 미덕으로 여기던 당시 선비들의 출처관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인조는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여헌종택에는 1623년 한 해만도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사헌부장령에 임명하는 교지와 신속한 부임을 종용하는 유지(有旨)가 쌓여 갔지만 장현광의 마음은 좀체 달라지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도 장현광을 향한 인조의 마음은 식지 않아 10여 차례에 걸친 소명과 사직의 반복에도 존경과 예우의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벼슬도 어느새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인조의 간곡한 당부는 장현광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비록 벼슬에는 뜻이 없었지만 임금의 성의를 매번 거부하는 것도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언가 사은의 예가 있어야겠다고 판단한 장현광은 1624년 3월 칠십의 노구를 이끌고 입경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부귀영화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선비 정신

장현광을 접견한 인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현광의 거듭된 사직을 자신의 부덕으로 돌리는 겸양도 잊지 않았다. 또 군정, 민생 등 시무책을 꼼꼼히 자문하였고, 장현광의 탁월한 견해에 크게 찬동하였다. 장현광이 어전을 나서자 인조는 천리원행에 행장이 여의치 않을 것을 염려하여 의복과 음식을 내릴 것을 명하는 세심함도 보였다.

그러나 장현광의 입경은 어디까지나 사은 때문이었지 벼슬을 위함이 아니었다. 인조를 알현한 이튿날 사직소를 제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에 인조는 장현광을 더 붙잡아 둘 요량으로 사헌부집의, 공조참의 등을 제수하고, 어의를 보내 눈병을 치료하게 하는 등 갖은 예우를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조와 장현광의 공식적인 만남은 2년 뒤인 1626년 4월 인조의 생모 계운궁의 초상을 계기로 다시 한번 이루어졌고, 그 후로도 인조는 출사를 종용하는 전갈을 끝없이 보냈지만 예의염치를 중시하고, 학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키며 살고자 했던 장현광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돌이키지는 못했다.

물론 장현광 역시 자신만을 생각하는 옹색한 인물은 아니었다. 인조의 바람에 호응하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의 직책을 수행했고, 간간이 상소로써 국정과 민생에 관한 개선책을 진달했다. 1637년 장현광이 향년 84세로 사망하자 인조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현광의 학덕에 대한 존경과 칭송, 유림의 영수이며 국가원로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곡진하게 표현했다.

인조는 장현광을 초빙하여 정권의 정당성은 물론 도학에 바탕하여 조정에 청신한 기풍을 세우고자 했다. 나아가 그를 군사(君師)로 예우하여 국정의 전반에 자문을 구하며 옛사람들이 말한 어수지교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장현광의 마음을 끝내 움직지지 못했고, 장현광 역시 군신의 도리를 그르치지 않으면서 개절(介節·곧은 절개)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록 큰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부귀영화 앞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었던 장현광의 지조와 항심(恒心·변함없는 마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것이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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