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누명을 쓸 수도 있으니까요….”
직장인 A(29)씨는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며 내심 뜨끔했다. ‘회식자리에서 술취한 여직원을 업어서 집에 바래다줬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렸다’는 내용이었는데, 회사에서 막내 뻘인 그 역시 적잖이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해당 글의 주인공이 겪은 고초를 보면서 ‘역시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한다. 그는 “정말 위급한 일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무시하기로 했다”며 멋쩍어했다.
경기 광명에 사는 주부 B(49)씨도 대학생과 청소년인 두 아들에게 비슷한 교육을 하고 있다. 남의 일에 절대 나서지 말라는 것. 흉흉한 소식이 잇따르는 가운데 아들들이 괜히 젊은 혈기를 부렸다가 곤경에 처할까봐서다.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범죄자로 몰리거나 다치는 등 독박만 쓰는 게 현실 아닌가요. 이기적인 게 아니라 합리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B씨의 생각은 확고했다.
타인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곤경을 보고도 나서지 않는 등 ‘방관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낯선 사람이 처한 위기를 보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제노비스 신드롬(방관자 효과)’이 짙게 드리워진 것이다. 더구나 최근 ‘미투’(#MeToo·나도 당했다)운동에 대한 반발로 “성범죄자로 몰릴 수 있으니 곤경에 처한 여성을 외면하라”는 식의 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이런 기류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다만 이런 무관심이나 외면을 두고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사람들이 방관자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의로운 참견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입거나 보호 받지 못한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나타난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괜히 나섰다가 봉변…” 외면의 이유들
26일 세계일보가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의뢰해 조사(지난해 12월 성인남녀 281명 대상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위험에 빠졌거나 도움을 요청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 중 이를 ‘외면했다’는 응답은 27.8%나 됐다. 또 타인의 범죄 피해를 목격했을 때 ‘가급적 나서야 한다’는 응답(33.1%)보다 ‘나서지 말아야 한다’거나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는 응답이 66.9%로 배 이상이었다.
나서지 말아야하는 이유로는 △피해자가 사라지면 궁지에 몰릴 수 있기 때문(35.2%) △폭행 등 범죄 위험에 처할 수 있어서(25.9%) △경찰 조사 등이 번거로울까봐(13%) 등이 꼽혔다. 남의 일에 나섰다가 되려 범죄자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구조를 망설이게 한 가장 큰 이유인 셈이다.
사실 이런 걱정이 괜한 것만은 아니다. 선의로 타인을 도왔다가 곤경에 빠지는 일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경우는 외려 성범죄자로 몰리는 일도 적지 않다.
지난해 7월 수원에 사는 박모(35)씨는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는 허모(33)씨와 허씨의 여자친구(29)를 말리다가 생각지도 못한 고초를 겪었다. 허씨에게 폭행을 당해 눈뼈와 코뼈가 부러진 데다 허씨의 여자친구가 “가슴을 만졌다”며 성추행범으로 신고해 수개월간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아야 했던 것. 결국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까지 된 박씨의 억울함은 담당 검사의 집요한 추궁으로 허씨가 자백한 이후에야 가까스로 풀릴 수 있었다.
온라인에선 이같은 사례를 모아 ‘도와주고 누명쓰기’라며 △반전형(다투던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는 경우) △증발형(피해자가 사라져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 △거부형(피해자가 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기 꺼려해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 △오해형(가해자가 사라져 가해자로 지목되는 경우) 등 유형까지 만들어져 공유되고 있다.
◆“여성은 안 돕는 게 상책” ‘유투’ 나선 남성들
최근 SNS에 등장한 이른바 ‘유투’(#YouToo) 계정들도 이런 분위기를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유투’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폭로하고 있는 여성들의 ‘미투’를 모방해 남성들이 여성으로부터 입은 성범죄 무고 등 피해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투’는 대체로 △여성과의 접촉을 원천봉쇄하는 ‘펜스룰’을 독려하거나, △남성들이 여성들로 인해 겪은 억울한 피해를 부각하는 등 2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유투’ 계정 운영자도 “성범죄 무고죄로 인한 피해를 고발하고 남성이 당하는 차별을 공론화하겠다”고 적었다.
물론 남성들의 피해를 공론화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미투운동을 남녀 간 성대결로 축소·변질시키거나 젊은 세대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더구나 ‘타인(여성)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식의 글들은 현실에서의 ‘외면 풍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꼭 폭력이 오가는 범죄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로 인한 피해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펜실베니아대 연구팀이 길거리 등 공공장소에서 진행된 심폐소생술 사례 1만9000여건을 분석한 결과 이중 남성의 45%가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여성은 39%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옷을 매만지고 가슴 부분에 손을 대야한다는 점이 사람들이 여성들을 돕는데 주저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게 연구팀의 분석이었다. 여성에 대한 ‘방관자 효과’가 통계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법으로라도 강제” VS “애꿎은 범죄자 양산”
한편 타인의 곤경을 외면하는 풍조가 확산하면서 “법으로라도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타인에 대한 구조행위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강도를 만나 다친 유대인을 사마리아인이 구해줬다는 성경 내용에서 유래한 명칭) 법’을 제정하자는 거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은 유럽 주요 국가와 미국, 일본, 중국 등 다수의 국가에서는 이미 시행 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6년 관련 법안이 입안돼 정치권에서 논의 중이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전 형사정책연구원장)는 “우리 형법체계가 독일식 법률에 영향을 받아 법과 도덕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법은 도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개인의 양심에 맡기기보다는 특별법 등을 제정해 일정한 강제성을 부여, 공동체가 지키려는 최소한의 윤리를 보호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조계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법의 ‘면책 조항’으로서의 성격과 ‘처벌 조항’으로서의 성격 중 면책 조항 측면이 강화돼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비에관셴스’(別管閑事·남의 일에 관여하지 마라)가 자녀교육의 제1조가 된 중국도 지난해 10월부터 ‘호인(好人·착한 사람)법’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은 타인의 권익을 보호해주려다가 피해를 입을 경우 권익을 침해한 사람이 보상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달아나거나 책임질 능력이 없을 경우엔 도움을 받은 사람이 피해를 보상토록 했다.
하지만 개인의 도덕적 행위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애꿎은 범죄자를 양산할 우려가 있는 데다 실제 현실에서의 적용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민만기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타인을 외면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은 가능하겠지만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실효성도 없고 윤리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며 “선한 행위가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한 행위’로 폄하되면서 사회가 더욱 삭막해질 가능성이 높다. 법률이 아니라 윤리교육 강화 등으로 해결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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