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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절의냐 공명이냐… ‘흔들리는 고뇌’ 소설로 풀다

입력 : 2018-03-10 18:00:00 수정 : 2018-03-10 10: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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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고독한 지식인’ 김시습과 갈림길 “푸른 풀밭 위에는 누렁이 잠자고, 높은 절벽에서는 흰 잔나비 우짖는다. 십 년 동안 이리저리 다녔건만 갈림길만 만나면 애를 태운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애를 태운다고 썼다. 10년 동안 전국을 떠돌아다닌 베테랑 나그네가 갈림길이 뭐라고 그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걸까? 김시습의 고뇌는 그와 단종, 그리고 세조와의 관계 속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절의와 공명의 갈림길 앞에 고뇌한 나그네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김시습은 청년이 되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며 포부를 키워가고 있었다. 스물한 살 되던 1455년 어느날,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이 끝내 단종까지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김시습은 3일간 통곡을 하고는 자신이 보던 모든 책을 불살랐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단종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세조는 끊임없이 김시습을 불러댔다. 자신을 거부했지만 버려둘 수 없는 아까운 인재였던 것이다. 세조의 부름에 응하기만 하면 김시습은 관직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라면 누구라도 이 길을 택하려고 했을 것이다. 김시습이라고 다를 리 없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지사의 가슴에는 절의가 있고、장부의 기개는 공명을 세우려 한다. 공명과 절의가 모두 내 일이거늘, 득실이 서로 뒤틀려 함께 아우르지 못하니 한스럽구나.”(옥루탄·屋漏歎)

김시습은 지사였으며, 동시에 대장부였다. 그러니 절의와 공명 모두가 인생을 걸고 도전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절의와 공명이 하나의 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여의치가 않다. 자신 앞에 엇갈리는 두 갈래 길로 펼쳐져 있었으니 어찌 갈등이 없었겠는가. 10년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어느 길을 걸을지 결정을 하지 못한 이유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한 길을 택해야만 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크게 절망했지만 김시습은 세조의 부름에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지사로서의 절의와 현실적인 출세의 갈림김 앞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금오신화는 이러한 고뇌의 산물이다. 왼쪽 사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인 김시습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후세에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김시습은 그 결정 과정을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담았다. 이렇게 고전소설 속에 담긴 이야기로 역사 속 인물의 생각을 읽어낸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암호를 푸는 것만큼이나 흥미롭고 설레는 일이다.

금오(金鰲)는 ‘경주 남산’을 가리킨다. 신화(新話)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뜻이다.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은 10년이 되던 31세에 금오산에 은거하며 5년을 지냈다. 이때에 ‘경주 남산에서 쓴 새로운 이야기’, 금오신화가 탄생했다. 김시습은 이야기 속에 현실에 대한 숙고의 결과와 자신의 다양한 철학을 세심한 필체로 담아냈다. 금오신화가 단순한 소설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김시습의 입장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이유이다. 금오신화가 완성되자 김시습은 석실(石室)에 감추며 ‘후대에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외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자신의 결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지 모르지만 먼 훗날, 누군가는 자신의 결정과 생각을 읽어낼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양생과 귀신의 사랑, 단종을 향한 김시습의 마음

금오신화에는 사람과 귀신의 사랑을 다룬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사람과 선녀의 만남을 그린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다른 세계인 염부지와 용궁을 배경으로 하는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재에 귀신, 용왕, 염부주, 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많은데, 이러한 소재가 작품 속에서 독특한 수단으로 작용하면서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만복사저포기에는 김시습의 생각을 읽어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양생과 귀신인 여인이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양생을 김시습, 귀신인 여인을 단종으로 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두 갈래 길에서 마침내 한 길을 택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인이 귀신이라는 점이다. 양생은 여인을 원했지, 귀신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귀신은 여인인 것 같지만 실상은 여인이 아니다. 살아 있는 여인을 만나고 싶었던 양생의 목표는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었다. 김시습 또한 현실에서 단종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귀신)을 처음 만났을 때, 양생은 그녀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혼자서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저도 사람입니다. 어찌 의심하실 일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다만 좋은 배필만 얻으면 될 것이니, 굳이 저의 성명을 물어 일이 잘못되게 하실 필요는 없지 않으신지요?”

여인(귀신)의 답이 엉뚱하다. 굳이 알려고 하지 말고 양생이 마음먹은 것만 이루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처음 원한 그 길을 가라는 말이다. 여기서 양생은 더 캐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종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고 따르겠다는 김시습의 일방적인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누구인지 따지기보다는 한 임금을 섬기라는 유교의 이념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여긴 것이다.

양생은 여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여인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양생은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다. 양생은 여인의 부탁에 따라 그녀가 준 은그릇을 들고 딸의 제사를 지내려는 여인의 부모를 기다린다. 길가에서 양생이 은그릇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본 하인이 말하였다. “아가씨 장례 때 무덤 속에 같이 묻은 귀한 물건들이 이미 도굴당한 것 같습니다.”

은그릇은 양생과 여인의 사랑의 징표이며 증거이다.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양생이 도굴꾼 또는 도굴된 물건을 가진 장물아비 정도로 비친다. 세조를 버리고 단종을 따르려던 사람들에 대한 당시의 부정확한 인식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우여곡절 끝에 관계를 인정받은 양생은 부모가 지내는 제사에 참여하여 다시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원한 이별을 한다. 그 후, 양생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여인을 위하여 천도재(薦度齋)를 올려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공중에서 그녀가 양생을 불렀다.

“저를 위하신 낭군의 정성에 힘입어 저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양생은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복사저포기의 결말이다. 양생의 정성으로 여인은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가 있다. ‘다른 나라’라고 하는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만 있다면 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만남과 결연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희망은 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이상과 목표가 저곳에 있다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남자’로 태어난 것은 다른 문제다. 처음부터 양생은 여인을 원했다. 여인이 남자로 태어났다면, 양생은 영원히 원하는 여인은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양생에게는 더 이상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목표가 사라졌다. 양생이 세상을 등지는 길을 선택하는 결말은 자연스럽다.

◆남아 있을지 모를 금오신화 원본을 기대하며

여인이 남자로 태어났다는 설정은 현세에서 단종과 재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김시습이 표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양생과 같이 단종을 따라 세상을 등질 결정을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시작된 김시습의 선택 과정은 용궁부연록에서 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금오신화의 원본이 없다. 그동안 우리는 최남선이 1927년 ‘계명’(啓明) 19호(1884년 일본 간행)에 소개한 것을 읽어왔다. 그러던 중 1999년, 중국의 대련도서관에서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이 조선에서 간행한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 없는 것은 아쉽지만, 조선에서 출간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혹시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가능성도 기대해볼 만하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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