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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효심보다 컸던 옹주의 정절… ‘애달픈 사랑’ 함께 묻히다

입력 : 2018-03-03 12:00:00 수정 : 2018-03-03 10: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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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영조가 사랑한 화순옹주와 부마 김한신 영조는 딸 화순옹주의 죽음을 애끊는 심정으로 글로 써서 전별하였다.

“誠淺莫回(성천막회: 정성이 천박하여 돌이키지 못했으나), 嘉爾隨貞(가이수정: 정절을 따른 네 마음 아름답구나.)”

아버지 영조의 간절한 당부도 멀리하고 남편 월성위의 뒤를 따라 화순옹주는 목숨을 끊었다. 월성위 김한신은 문장이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깨끗하고 고고한 선비의 풍모는 많은 이들의 탄복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런 그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랑이 깊었던 화순옹주는 식음을 전폐한 지 14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영조는 딸에게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썼으나, 옹주는 고집을 꺾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김한신에 쏠린 영조의 관심

김한신에 대한 애정은 영조 역시 컸다. 화순옹주와 김한신 당사자들이 혼사 전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혼사 당시에 영조는 김한신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오고 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득달같이 보고하라는 호령이 매우 준엄하였다. 부마 초간택 때 영조의 신경은 날카로워져 온통 김한신의 출현에 쏠려있었다. 세계기록유산인 의궤와 닮은 등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화순옹주가례등록’의 ‘사기(私記)’라는 두주 아래에다 초간택 때 간택 처소까지 예비 부마들이 입궐하는 정경을 흥미롭게 그려놓았는데,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라 길게 인용해 본다.

“이날 사시(巳時·오전 9∼11시)의 간택 때문에, 한성부에서는 간택인들에게 파루를 기다렸다가 와서 통화문 밖에 모이라고 알렸다. 날이 밝기 전, 한성참군 이보성이 의막(依幕)을 통화문 밖의 북변에다 설치하고, 각 부의 관원들과 함께 앉아서 동몽(간택에 참여한 이들)의 점검을 서둘렀다. 예조정랑 김몽후는 통화문 안에 있는 수문장청에 들어가 앉아서 역시 검칙했다. 3각 전에, 별감이 와서 간택인을 즉시 들여보내라고 전하니, 각각 유모와 철릭을 입은 하인 한 명씩을 거느리고서 들어오게 하라고 한성부에 분부했다. 예조정랑과 한성부참군이 들어가 명광문 앞에서 좌우로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한성부에서는 간택인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붓으로 점을 찍고 명광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성부에서는 각각 동몽의 이름 아래에 유모와 하인의 이름을 적고서 들여보냈다. 조금 있다가 별감이 또 나와서 한성부와 각 부의 관원 참석자 명단을 재촉해서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이보다 먼저, 배설방에서는 장막을 춘당대 아래 남변의 길게 이어진 길에 배설했다. 동몽들은 그 안의 좌우에 줄지어 앉아서 각각 과상을 받았다. 배와 홍시 한 그릇, 치적(꿩고기) 한 그릇, 의이죽(율무죽) 한 그릇, 잡탕 한 그릇, 이렇게 네 그릇이었다. 먹기를 마치면, 일제히 영화당의 임금이 앉아 계신 곳으로 가서 뵈었다. 들어갈 때에는 각각 보계의 상판 끝에서 곡배하고 들어갔다.”

영화 ‘궁합’의 간택 장면. 김한신은 부마 간택 당시부터 영조의 지극한 관심을 받았다. 맨 아래 사진은 월성위 김한신과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합장묘.
간택 참가자인 동몽들은 창경궁의 외문인 통화문 앞에 집결하라는 통고에 따라 파루가 지나자마자 모여들었다. 그들은 분홍직령과 세조대, 부전, 행전, 흑혜자 차림이었다. 예조와 한성부의 관리들이 나와 궁궐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날이 밝기 전에 동몽들을 점검하고서 궐 안으로 들여보냈다. 명광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였다. 약속시간 전 3각, 곧 45분 전이 되자, 들여보내라는 별감의 전명이 도착했다. 한성부 관원은 다시 동몽들을 일일이 호명하여 점검하고서 차례로 들여보냈다. 동몽은 유모와 하인 한 명을 대동하였으며, 동몽의 이름 아래에 이름을 적어서 불상사에 대비하였다.

이날의 간택장소는 영화당이었다. 영화당 앞으로 넓은 마당의 춘당대가 있는데, 이곳에 임시로 쳐놓은 장막 안으로 들어가 줄지어 앉은 동몽들은 간편 식사로 대접받았다. 배와 홍시, 꿩고기, 율무죽, 잡탕 등 네 그릇이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들은 영화당으로 이동하여 보계 끝에서 곡배를 하고 영조를 뵈었다. 

◆간택 때 사실상 부마로 내정된 김한신

그 자리에서 동몽들은 책을 읽고 글씨를 써보였다고 한다. 워낙 인원이 많아 날이 저문 후에야 파하였는데, 각 동몽들에게는 상급으로 초주지 1권, 백면지 2권, 호초 2되, 백반 1되, 필묵 등을 지급했다. 그중에서 영조는 승지 성덕윤의 아들 흘주에게 표피 한 장을 더 주었다. 성덕윤은 선조 때의 명신 성혼의 후손으로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혹시 영조가 흘주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으나, 초간택에서 선발된 명단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화순옹주가례등록’에는 화순옹주의 남편을 고르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초간택 참가자 중에는 김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부마로서 김한신을 점찍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간택에 참석코자 입궁할 간택인 명단에 김한신은 ‘재외미급상래질(在外未及上來秩)’에 포함되어 있었다. 곧 지방에 있으면서 미처 올라오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한신의 부친 김흥경은 전 해에 이조판서를 제수받았으나 인사행정이 혼탁스럽다며 거절하고 올라오지 않았다. 마지못해 5월에 황해도 감사로 전보시켰으나, 이 직도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출사하지 않았다. 영조는 그의 사직상소를 받아서 들이지 말라고 명하고는 한 달 여가 지나도 꿈쩍 않자 더 이상은 안 되겠던지 그를 불러 인견하였다.

부마 간택 당시에 김흥경은 황해도 관찰사의 감영 소재지인 해주에 머물고 있었다. 김한신도 부친을 따라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도의 단자 제출 기한이 황해도는 8월 25일이었다. 감사 김흥경은 22일 내에 보고하라는 공문을 받고, 자신의 아들과 손자의 단자 두 장을 먼저 올려보냈음을 보고하였다. 손자는 통덕랑 김한정의 아들 태주였으며, 초간택 참가자 명단의 꼴찌에서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초간택 길일은 28일로 정해졌다. 영조는 간택인을 단자를 올려보낼 때 동시에 보내라고 지시한 바 있는데, 이를 따랐다면 김한신은 날짜에 맞춰 충분히 상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주와 서울 사이의 거리는 365리였다.

초간택에는 모두 83명이 참석했다. 왕비 간택 때에 비해 대단히 큰 규모였다. 한성부에서 올린 단자는 102장이었으나, 이 중에서 사조(四祖)에 뚜렷한 현관이 없거나 탈이 있는 자의 단자 28장이 제외됐다. 그 74장에다가 각도에서 올린 단자를 합쳐 83장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방에서 올린 단자는 9장밖에 되지 않았으니,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 분포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경기도에서도 경내에는 원래 흘러들어와 사는 사대부집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영조는 입궁한 간택인 명단을 받아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한신의 이름 아래에 ‘미상래(未上來)’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영조는 즉시 서울에 들어왔다면 오늘의 간택이 파하기 전에 반드시 참석할 것을 명했다.

한성부에서는 임금의 명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남부참봉 구완이 본가에 가서 물어보고는 와서 아뢰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친이 가서 물어보니, 형 한정이 겨우 들어와서 금방 전교가 내려졌음을 알고 급히 달려가 대궐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예조정랑과 한성부참군, 남부참봉은 일시에 승정원으로 가서, 김한신이 막 들어와서 지금 당장 참석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승정원에서는 이 사실을 영조에게 넌지시 아뢰었다.

드디어 김한신이 통화문 밖에 나타났다. 예조 서리가 바로 춘당대로 들어가 승전색에게 알리고, 승전색은 영조에게 진달했다. 그러자 영조는 전교를 내려 즉시 참석할 것을 분부했다. 명광문이 다시 열리고, 김한신은 이렇게 해서 간신히 간택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간택 과정을 돌아보면, 역시 김한신은 내정된 부마였다. 그의 인물됨이야 널리 알려졌지만, 내정의 계기는 정성왕후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임민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화순옹주의 죽음, “사랑은 넘치나 효도가 모자라다”

화순옹주는 열녀로서 정려되었다. 영조는 ‘정절은 있으나 효가 모자라다’고 평하고, 열녀로서의 표창을 완곡히 거절하였다. ‘사람 잡아먹는 예교’라는 말이 있다. 교화를 명분으로 자행되는 극단적이면서 폭력적인 행동양식을 인륜의 도로 포장하거나 미화하여 강요하는 사회의 비뚤어진 면이 지나쳐서 나온 말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야 탓할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부족하여 인륜을 해치는 하극상은 예나 지금이나 각성해도 모자라다.

임민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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