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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먹자판 세상이지만 / ‘엄마의 솥단지’가 지은 밥은 신성 / 노동의 대가인 돈도 / 그렇게 먹어서 버릴 일은 아냐 명절을 맞는 여인의 마음은 대충 비슷하리라. 워킹맘은 물론 전업주부일지라도. 음식을 마련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인의 몫, 더구나 직장에 나가다 보면 음식 만드는 일이 벌써 걱정일 것이다. 대가족 시절엔 대우받던 할머니들도 지금은 마찬가지이다. 아들네 딸네가 올 테니, 또 차례상 제사상도 준비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무슨 핑계든 대고 할아버지와 함께 훌쩍 여행을 떠나 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도 평생을 워킹맘으로 살다 보니 명절이 오기 한참 전부터 걱정이 태산이고는 했다. 집 청소 걱정에, 음식 할 걱정 돈 걱정 등 말이다.

그런데 옛날 우리 엄마는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어찌 그렇게 ‘힘센 아줌마’일 수였을까. 솥단지를 이고 다섯 살 먹은 딸을 걸리고 하면서 피난열차 지붕 꼭대기에 올랐을 뿐 아니라 피난열차가 정차하면 기차지붕 꼭대기에서 내려와 밥을 하다가 기차가 떠나면 밥이 거의 다 돼가던 솥단지를 들고 피난 열차에 다시 오르고. 다섯 살배기 딸은 엄마의 치마꼬리를 잡고 울고불고.

엄마는 “청년들이 새댁이 불쌍하다고 끌어올려 주곤 했단다. 너도 안겨 올라가곤 하고. 임진강을 건너던 날에도 그랬잖니. 새댁인 데다 네가 예쁘다고, 어서 젖을 주라고. 역장은 난로가 있는 역장실로 잡아끌었지. 임진강을 건널 때는 네가 울기라도 할까봐 입을 막았었는데 다행히 네가 울지를 않아 소련군에게 들키지 않고 강을 건너 동두천에 닿을 수 있었지. 다섯 살 위 언니는 젖을 먹이지 않아도 돼 고향에 남겨놓고 왔었지, 잠깐 다녀갈 생각으로”라고 말했었다.

젖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안다 해도 그 맛을 모르는 젖을 왜 먹어 우유를 먹어야지. 아기는 우유를 먹는 거야 하고 무엇을 먹겠느냐는 아빠의 질문에 ‘집밥’을 먹겠다고 의견을 피력하는 요즘 ‘손주’들은 그 ‘힘센’ 할머니의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물론 이제 어엿한 어머니인 딸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아무튼 ‘엄마의 솥단지’ 시절을 생각하면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어떤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니 ‘집밥’이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집밥’을 식당이라는 곳에서 하다니 생각하면서도 그 집밥의 내용이 궁금할 뿐 아니라 어린 시절 ‘소반도 생각나는 바람에 ‘집밥으로 주세요’라고 한 적도 있는 요즘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니 그 식당이름은 ‘집밥’이었다. 부제로 ‘집밥만 합니다’라고 써 있었고.

어쩌다 보니 세상은 ‘먹자’ 세상이 됐다. 우리 동네 어떤 유명한 국숫집에는 손님이 하도 많아 식당 밖에서 기다리게 되곤 하는데 그때 들고 있는 것이 나무주걱이다. 그 나무 주걱에는 번호가 써 있다. 번호를 부르면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국수를 기다리며 길에 번호주걱을 들고 서 있자면 흥부 놀부 이야기에 등장하는 놀부마누라의 주걱도 생각나고, 꼭 내 뺨에 밥알이 몇 알 붙어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뺨을 쓰다듬은 경험도 있다.

강은교 동아대 명예교수·시인
식사 시간이면 젊은이들은 스마트 폰으로 맛집부터 찾는 시대.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 되는 시대라는데 식당이 넘치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한 기분마저 든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굉장하구나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아냐, 취업이 안 돼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먹기나 하자’, 또는 ‘먹고 보자’라며 젊은이들이 식당에 달려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아무리 먹자 세상이 돼도 밥뿐 아니라 돈까지도 말하자면 먹자판의 세상이지만 밥은 신성하다. ‘어머니의 솥단지’가 끓이는 집밥은 정말 신성하다. 노동의 대가인 돈도 그렇게 먹어서 버릴 일이 아니다.

올해 설은 정말 다정히 보냈으면 싶다. 가족이 모처럼 모여 돈 때문에 어떤 계층 싸움이 어디선가 벌어지지 않는 그런 다정한 명절. 형제 중 가장 돈 못 버는 형제가 오기 싫지만 마지못해 오는 그런 명절이 아니면 정말 좋겠다. 너무 차가운 빛을 던지는 발광다이오드(LED)등이 아닌, 오렌지빛을 가족 가슴마다 켠 그런 따뜻한 새벽이, 저녁이, 밤이 왔으면 좋겠다.

강은교 동아대 명예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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