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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 / 도재경
간판도 없는 상점 입구에는 한쪽 날개가 부서진 천사의 조각상이 걸려 있었다. 그곳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름한 잡화점에 지나지 않았는데 뽀얀 먼지가 가득한 진열장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러나 축 처진 눈매 탓에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난쟁이 동상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사실 녀석은 입이 쩍 벌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곤 거리를 산책하며 보았던 여느 난쟁이 동상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거리의 녀석들은 제각기 독특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가령 화재로 복원 중인 성 엘리자베스 성당 앞에는 불 끄는 소방관 난쟁이 동상이, 노천카페 부근에는 보드카와 맥주를 마시는 술주정뱅이 난쟁이 동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길을 타 반지르르한 거리의 녀석들은 행인들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열장의 녀석은 이전에 보았던 난쟁이 동상과는 왠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녀석은 고깔모자를 푹 눌러쓴 채 손나발을 불 듯 두 손을 입가에 대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절규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녀석은 뭘 말하려는 걸까?

나는 상점 문을 열었다. 싸한 금속 냄새와 케케묵은 책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입구 쪽에는 빛바랜 엽서를 비롯해 헌책 따위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고, 선반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두침침한 백열등이 비추고 있는 작은 탁자 위에는 자전축 나사가 빠진 지구본이 갸우뚱하게 놓여 있었는데, 그 너머에서 늙은 주인이 유령처럼 얼굴을 쓱 내밀었다. 나는 상점 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주인에게 진열장의 녀석이 무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주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는 벙거지를 슬쩍 들어 올리며 진열장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청동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용접을 하면 문제없다며 조각을 녀석의 입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그러자 슬퍼 보였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녀석의 얼굴엔 천진난만한 기쁨이 사르르 번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그것은 다름 아닌 녀석의 입에 물려 있던 빵이었다. 빵을 먹는 난쟁이. 어쩐지 조금은 싱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냥 나오기가 뭣해 가게 안을 서성거리자 주인은 내게 찾는 물건이 있냐며 친근한 어투로 물었다.

여기에선 팔지 않는 물건이 없소. 여기 없는 물건은 세상에도 없지요. 여길 봐요. 촛대, 은그릇, 사진첩, 그림, 자물쇠, 심지어 일기도 있어요. 저쪽 구석에 잘 찾아보면 빌어먹을 총통 나리가 쓴 연애편지도 있을 거요. 그건 불쏘시개로 쓰거나 뒤를 닦는 데에 제격이죠.

주인은 폴란드인 장사꾼치고는 영어가 꽤나 유창했다. 만약 작달막한 청년이 한 질의 책을 팔기 위해 가게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주인이 늘어놓는 장광설을 대책 없이 듣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청년이 책값을 흥정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시차 탓에 여전히 머리가 묵직했다. 광장 근처에 위치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샌드위치와 맥주 한 팩을 샀다. 나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한 뒤 노트북을 펼쳤다. 몇 통의 메일이 수신되어 있었다.

먼저 가제타 비보르차의 마이코프스키 기자로부터 온 메일을 열었다. 동년배인 그는 십여 년 전 영화제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아온 사이였는데 서울을 떠나기 전 그에게 야체크 피에카르스키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해놓은 터였다. 그는 마침 브로츠와프에 취재차 방문할 일이 있으니 괜찮다면 다음 날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했다. 만약 그로부터 답장이 없었다면 브로츠와프 대학을 직접 방문해 볼 작정이었으므로 번거로움을 덜게 된 것이다. 나는 흔쾌히 좋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어서 박 류드밀라 여사의 조카인 율리아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참석을 겸해 폴란드에 들를 계획이라며 메일을 보낸 게 보름 전 일이었으니 박 류드밀라 여사는 분명 피에카르스키에 대한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조카로부터 온 메일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박 류드밀라 여사가 여든여섯을 일기로 타계한 것이다. 


박 류드밀라 여사를 처음 만난 건 재작년 봄 ‘긴 벽’을 촬영하기 위해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에 방문했을 때였다. 고려인 아이들을 위해 몇 편의 동화도 집필한 경력이 있는 그녀는 한평생 강제이주 역사를 연구해온 재야의 학자였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인터뷰를 할 때만큼은 유독 한국어를 사용하려고 애썼다. 촬영을 앞둔 당시, 그녀가 수집해온 각종 기록물과 증언에 대해 내심 기대했던 바가 컸던 게 사실이다.

크렘린의 독재자가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한 1937년 가을, 그녀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녀의 막냇동생은 우수리스크에서 카라간다 지역으로 이동하던 열차 화물칸에서 아사해 시베리아 벌판에 버려졌고, 모친과 오빠는 카라간다에 도착한 후 학질에 걸려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부친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강제이주 직후 간첩죄로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결국 실종되었다. 천애의 불모지에 남겨진 그녀가 한 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겪어온 간난신고는 여느 고려인과 다를 바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훗날 그녀의 부친이 코틀라스 강제수용소에서 괴혈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접한 뒤 그녀는 ‘고려인 실종자 명부’ 집필에 착수했다.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그녀가 직접 답사하고 발굴하여 정리한 ‘고려인 실종자 명부’는 아쉽게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는데, 그 많은 실종자를 일일이 찾아내는 작업이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연구해온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에 대한 자료들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 실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촬영 부분은 절반 이상을 도려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의 증언과 기록들을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고모, 또 그 얘기예요?

율리아가 박 류드밀라 여사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박 류드밀라 여사는 지난해 가을 마지막 인터뷰를 할 때까지 다큐멘터리의 기획의도와 벗어난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다. 당연히 인터뷰는 번번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게 보여주려던 문서를 탁자에 내려놓고 느닷없이 피에카르스키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게 있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낡은 궤짝에서 손수건에 싸인 물건을 꺼내었다. 그것은 피에카르스키가 보르쿠타 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그녀에게 줬다는 하모니카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모니카 연주 실력이 좋아 곧잘 아리랑을 비롯해 여러 민요를 따라 불렀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박 류드밀라 여사의 굽은 손을 붙잡고 다큐멘터리 제작이 끝나는 대로 그에 대해 수소문해보겠다고 선뜻 약속하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심지어 무모하게까지 여겨졌다. 설령 그가 지금껏 살아있다고 해도 백 살 가까운 노령인지라 두 사람의 재회를 장담할 수도 없었다.

피에카르스키가 실존했던 인물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박 류드밀라 여사가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요청하여 어렵사리 확보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카라간다 정치범 수용소와 농업 교정 노동 수용소를 거쳐 우랄산맥 북단 보르쿠타 수용소로 이송되어 강제노역에 동원된 바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기간은 약 10개월로, 피에카르스키가 정치범 수용소에서 농업 교정 노동 수용소로 이송돼 후방 교육 일꾼으로 복역하던 시기였다. 당시 류드밀라는 열다섯, 피에카르스키는 스물다섯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작업은 끝이 없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다 날라야 했다. 그런 와중에 고문과 강제노역으로 만신창이가 된 피에카르스키를 그녀가 직접 간호했다고 한다. 그녀가 문제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로켓이요?

박 류드밀라 여사의 첫 인터뷰 중 나온 얘기는 너무나도 뜬금없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우주로 로켓을 발사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녀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 나는 헛웃음조차 칠 수 없었다. 그녀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사리가 밝았고 적잖은 유머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주로켓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내가 아는 바로 우주에 발사된 최초의 인공위성은 스푸트니크 1호였다. R-4 로켓에 의해 발사된 그 인공위성은 석 달간 지구를 돌다가 대기권으로 진입해 타버려 수명을 다했다. 한데 박 류드밀라 여사의 말에 의하면 최초의 우주로켓은 그보다 십이 년 앞서 발사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피에카르스키에 의해서 말이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주 개발 역사는 새로이 쓰여야 했다. 나는 메모하던 볼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브로츠와프 출신의 야체크 피에카르스키가 카라간다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된 시기는 1945년 6월이었다. 그가 이송되기 두 달 전, 발트해 연안의 폐허가 된 페네뮌데 로켓 기지에서 의문의 로켓 한 발이 발사되었다. 요즘 같으면 최첨단 레이더망에 꼼짝없이 걸려들어 격추되었을 테지만 당시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베를린 함락을 목전에 둔 연합군은 들떠 있었고, 돼먹지 못한 짓만 일삼다가 궁지에 내몰린 총통이란 작자는 자신의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 청년이 국경을 넘다가 소련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독일의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을 쫓고 있던 소련 비밀경찰에게 까까머리 청년의 존재는 보잘것없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던 로켓 설계도가 문제였다. 소련 비밀경찰의 험악한 심문에 청년은 자신이 폰 브라운 로켓 연구팀의 조수였고 얼마 전 발사버튼을 누른 장본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네 녀석이 발사한 로켓이 어디에 떨어졌다는 거지?

소련 비밀경찰이 물었다. 청년은 짙푸른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 달을 지나고 있을 겁니다.


나는 박 류드밀라 여사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제2차 대전 당시 우주로켓이 발사됐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만약 피에카르스키가 쏘아 올렸다는 로켓의 탄두부에 측정기나 송신기 따위라도 탑재했더라면 최초의 우주 탐사선으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나 싶어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도서관과 인터넷 자료들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우주로켓이 발사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당시 로켓 공학 기술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소련의 로켓 공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린 일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내로라하는 로켓 공학자들마저도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우주로켓을 발사한 마당에 한낱 조수에 불과했던 청년이 그 어떤 시행착오도 없이, 그것도 단독으로 그 일을 해냈다니.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폰 브라운이나 코롤료프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일이었다.

창밖에서 사람들의 환호성과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맥주 캔을 든 채 창가로 다가섰다. 저녁 아홉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지만 거리는 늦은 오후처럼 환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악사가 광장의 벤치 위에 올라서서 흥겹게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고, 고깔을 쓴 젊은 남녀가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중이었다. 광장 주변 테라스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이 술과 음료를 즐겼고, 아코디언 연주가 끝나자 갈채를 보냈다.

춘천에서 태어난 그녀가 모친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한 건 네 살 때 일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부친은 그해 겨울 어린 그녀에게 팽이를 깎아 주었다. 오빠를 따라 꽝꽝 언 개천에서 팽이를 치고 놀았고, 해가 지면 작은 초가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박 류드밀라 여사는 그때를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추억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마지막 인터뷰를 하던 날, 나는 박 류드밀라 여사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두 눈이 침침한지 연신 껌뻑거리고는 우두커니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나는 잠시 후 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건네야 했다. 하지만 그게 우문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 어디로?

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되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일순간 묘한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박 류드밀라 여사는 아무런 말 없이 주름진 입가를 손수건으로 훔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소리는 카라간다의 메마른 바람처럼 푸석푸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 하나뿐인 동생은 예순을 넘기지 못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나이가 들어서는 둘째 조카인 율리아에게 의탁해 오던 터였다. 그날 늦은 오후 마지막 촬영을 위해 우리는 카라간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묘지를 방문했다. 율리아는 고모가 매달 한 번씩 그곳을 찾는다고 알려주었다. 박 류드밀라 여사는 동생 묘비 위의 자잘한 흙 알갱이들을 손바닥으로 쓸어냈다. 그녀의 손길이 가닿은 묘비는 반질반질했다. 나는 묘비 앞에 엎드려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율리아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서쪽 하늘이 어느새 자홍빛으로 물드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묘지를 벗어나 황혼으로 물든 초원을 걸었다. 나는 내심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며 스태프와 함께 그들을 천천히 뒤따라갔다.

율리아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박 류드밀라 여사는 서랍에서 모서리가 닳은 두꺼운 공책 두 권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빛바랜 공책에는 한국어와 러시어가 빼곡히 병기되어 있었다. 첫 권에는 그녀가 피에카르스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비롯해 그와 함께했던 일들이 꼼꼼히 적혀 있었는데 심지어 그가 그려 주었다는 로켓 설계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권에는 그의 행방을 추적한 자료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로켓이 뭔지 몰랐지.

그녀는 돋보기를 쓰고 공책을 찬찬히 넘겨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았어.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밤하늘을 여행하는 기관차 같은 거라고 설명해 주더군. 그러자 덜컥 겁이 나는 게 아니겠어. 모스크바의 불한당이 하다하다 못해 이제 우리를 아예 세상 밖으로 내쫓아버리려는 수작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더군.


정말로 그가 우주로켓을 발사했다고 믿으세요?

그럼 무슨 이유로 믿지 않을 수 있겠나? 자네들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이제 로켓이 뭔지는 어느 정도 안다네. 그걸 저 위로 날려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말이야.

나는 동양에서 온 작은 소녀와 서양에서 온 청년이 감시병 눈을 피해 갈대숲에 숨어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가 피에카르스키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명했다.

그땐 사는 게 더 거짓말 같았으니까.

두 사람이 헤어진 건 1947년 봄이었다. 피에카르스키는 쇠사슬에 매인 채 가축 수송용 무개 화물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곳은 바로 보르쿠타 수용소였다. 박 류드밀라 여사가 스크랩한 자료에는 피에카르스키가 1947년부터 1953년까지 그곳에 수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53년, 보르쿠타 수용소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직후부터 그의 생사는 묘연했다. 사망자나 부상자 명단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훗날 박 류드밀라 여사는 피에카르스키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했다던 생존자들을 수소문해서 만났다. 그들은 피에카르스키가 폭동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그날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한데 의아한 건, 그들 역시 피에카르스키가 우주로켓을 쏘아 올린 장본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날 저녁 율리아가 우리를 식탁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상은 소박한 편이었다. 식탁에는 된장을 묽게 풀어 끓인 배춧국과 카자흐스탄 전통 빵인 바우르삭, 그리고 배추김치, 배고자, 팥고물 떡 등이 차려져 있었다. 박 류드밀라 여사는 한국의 만두보다 훨씬 더 맛있을 거라며 배고자가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정말 그랬던가?

그녀가 권했던 음식의 맛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애도의 답장을 쓰려다 말고 노트북을 덮었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황량하고 낯선 이국 땅, 그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았던 카라간다 초원에 묻혔을 것이다. 그녀에게 고향은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녀로부터 건네받은 두 권의 공책을 가방에서 꺼내어 펼쳐 보았다. 공책의 앞장에는 야체크 피에카르스키에게 보내는 정성스러운 편지글이 적혀 있었다. 그를 찾으면 전해 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이 어쩐지 허망하게 여겨졌다. 설령 피에카르스키가 생존해 있더라도 까마득한 나이였다. 무슨 수로 공책을 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책의 무게를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창문 밖 주홍색 불빛이 크고 작은 건물들을 비추었다. 나는 미지근해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덧 거리는 한산해졌고, 멀리서 취객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광장 구석진 곳에 낡은 모포를 뒤집어쓴 구부정한 부랑자 한 명이 종이상자를 펴서 잠자리를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종이상자 위에 앉아 꼬깃꼬깃한 신문지에 싸인 빵을 꺼내어 먹었다. 가로등 불빛이 어슷하게 내리비추는 그의 얼굴은 멍이 든 것처럼 칙칙해 보였다.


1939년, 브로츠와프는 이미 독일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독일군은 사회 인프라는 물론 피란 행렬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폭격을 가했고, 심지어 묘지까지 파괴했다. 피에카르스키의 가족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몰살당했고 요행히 그만 살아남았다. 박 류드밀라 여사의 말에 따르면 피에카르스키는 브로츠와프 대학의 유능한 공학도였다고 한다. 당시 독일군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인들을 절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군은 폴란드 점령 직후 사회지도층이나 교수, 의사 등의 엘리트들을 우선적으로 색출해 처형했고, 수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거나 강제수용소에 가두었다. 그런데 어째서 독일군은 유능한 공학도였다는 피에카르스키를 살려두었던 것일까. 어찌 됐건 그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폰 브라운의 로켓 연구팀에 합류하였다고 해도 또 다른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폰 브라운이 개발한 A-4 로켓의 시험발사가 성공하자 베를린의 우두머리는 즉각 ‘보복의 무기’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른바 V-2 로켓. 런던으로 발사된 이 새로운 무기로 인해 사람들은 또 다른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로켓의 덩치는 더 커졌고 탄도거리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폰 브라운은 독일에서 미국 본토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전쟁 막바지에 미국과 소련이 폰 브라운의 로켓에 눈독을 들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폰 브라운이 개발한 로켓은 그만큼 독보적이었다. 하물며 당시 스무 살을 갓 넘긴 애송이가 제아무리 뛰어난 공학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폰 브라운이 과연 그를 필요로 했을까. 또 하나, 폰 브라운은 베를린의 우두머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재빨리 미군에 투항한다. 당시 미국은 독일의 고급 기술자들을 비밀리에 빼돌리기 급급했는데 만약 그들에게 피에카르스키가 필요했다면 미국행 명단에 당연히 그의 이름을 포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에카르스키의 행적이 석연치 않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일군은 페네뮌데에서 퇴각하면서 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렇다면 피에카르스키는 폐허가 된 기지에 홀로 남아 부품을 조립해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렸다는 것인데. 어쩌면 정확한 지점에 로켓을 떨어뜨리는 일보다 대기권 밖으로 로켓을 날려 버리는 게 더 쉬운 일이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 무모한 짓이 아닌가. 더군다나 페네뮌데는 곧바로 소련의 붉은 군대가 점령했고, 그들 역시 로켓 기술자들을 색출하던 중이었다. 그 와중이라면 누구라도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소련 비밀경찰에게 붙잡힌 직후 쓸모가 있었다면 분명 소련의 로켓 공장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끌려간 곳은 다름 아닌 카라간다의 불모지였다.

피에카르스키의 로켓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 않은가. 우주로켓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얘기였다. 박 류드밀라 여사가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일정 부분 왜곡된 기억이 있기야 하겠지만 부러 허황된 이야기를 지어낼 까닭은 없었다. 당시 그녀는 로켓이 뭔지도 몰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우주로켓은 피에카르스키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린 류드밀라에게 그런 엉뚱한 얘기를 지어내 들려준 것일까? 한편 박 류드밀라 여사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우주로켓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나이가 십대 중반이었다 하더라도 이후 충분히 검증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 그녀 역시 내가 가져왔던 의문에 맞닥뜨렸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한사코 우주로켓이 발사되었다고 믿어온 것일까?


자네가 부탁한 걸 알아봤는데 말이야.

다음 날 오후, 오데르 강변으로 이어진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마이코프스키를 만났다. 카페에는 진한 치즈 냄새가 풍겼다. 건너편 테이블에는 중년의 여인이 치킨커틀릿을 먹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마이코프스키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더군.

그의 말인즉 누군가 야체크 피에카르스키의 이름을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닌 것처럼 도처에서 그의 행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921년 브로츠와프에서 출생한 야체크 피에카르스키는 분명 한 명이었다. 이후 1939년까지 그는 브로츠와프에 거주했으며,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 당시 그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한데 거기서부터 이상했다.

전공이 철학이라고?

응.

마이코프스키는 문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명 철학이라고 적혀 있어.

박 류드밀라 여사가 기억하기로는 피에카르스키는 공학도라고 했다. 물론 그녀가 착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철학을 전공하던 그가 무슨 수로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었을까.

그밖에도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자료를 넘겨보던 나는 점점 혼란에 빠져들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그의 행적은 마이코프스키의 말마따나 유럽 전역을 망라했는데 가히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일테면 절멸수용소 중 하나로 알려진 슈투토프 강제수용소의 생존자 명단에는 분명 야체크 피에카르스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같은 시기 가디언 지(紙)의 한 지면에는 영국 공군의 전투기 중대에서 활약한 망명 폴란드 출신 조종사인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1943년 폴란드 망명 정부 명단과 이듬해 바르샤바 봉기군이 배포한 유인물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함부르크 폭격 당시 폴란드인 사망자 명단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전사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있었다. 분명 모두가 출생일과 출생지가 같은 동일 인물이었다. 내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마이코프스키가 애써 찾아온 자료들은 기록상 착오라고 보기엔 범위를 너무나도 벗어난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가 로켓을 쏘아 올렸다고 유추할 만한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럴 수가 있지?

그건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어. 이 사람 도대체 누군가?

로켓을 발사한 사람. 게다가 지구 밖으로 말이야.

뭐라고?

마이코프스키는 두 손을 펼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긴 벽’의 미편집 영상을 마이코프스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프스키는 박 류드밀라 여사의 인터뷰 영상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거 흥미진진한 걸.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나는 가방에서 박 류드밀라 여사의 공책을 꺼냈다.

이거 정말 집요하신 분이구먼.

마이코프스키는 공책을 훑어보며 말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빅뉴스가 되겠는 걸. 그렇지 않나?

물론이야.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당시 과학 기술로는 어림도 없었지. 이건 둘 중 누군가의 공상에 불과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때의 공상이 오늘날엔 현실이 되기도 했잖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찾아가 보는 건 어때?

마이코프스키는 지도를 검색해 보더니 피에카르스키가 살았다는 집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그의 생가는 카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작은 실마리조차 찾기 힘들 테지만 이대로 시간만 허비하다가 떠나긴 찜찜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오데르 강변으로 향했다. 하늘은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습한 바람에 이따금 젖은 풀냄새가 맡아졌다. 마이코프스키는 이동하는 동안 ‘긴 벽’에 대한 간략한 인터뷰를 진행해도 되겠냐며 녹음기를 꺼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마이코프스키는 먼저 ‘긴 벽’을 본 간략한 소감을 밝힌 뒤 경력이 풍부한 기자답게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이끌었다. 몇 차례 문답이 오간 뒤 그는 ‘긴 벽’이 내게 부여하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혹시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닐까 해서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 ‘긴 벽’이 자네에게 부여하는 의미.

어려운 질문이군.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결국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가?

글쎄? 촬영을 끝내고 보니 애초 기획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되더군. 상식적으로 보면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들이 살아남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종교나 어떤 신념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한데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삶이 뭘까?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과연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늘 그래왔듯 난 그저 현실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고자 했을 뿐이야. 하지만 그들의 사연을 오롯이 담아냈는지 의문이 들어. 부끄럽지만 아마도 그건 나의 한계이기도 하겠지.

현실을 기록하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는 픽션과 두드러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그 역시 재구성된 하나의 이야기다. 쓸 만한 장면을 추려내 부품 조립을 하듯 이리저리 재배치해야 한다. 극적인 장면도 필요하다. ‘긴 벽’ 역시 이러한 전형에 충실히 따르려 했을 뿐, 그것을 통해 내게 어떤 의미가 부여되리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촬영을 하는 동안에는 그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줄곧 가슴 한구석이 헛헛했다. 어쩌면 박 류드밀라 여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녀의 인터뷰는 촬영 중에 만난 어느 누구보다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녀의 일화는 애초 기획했던 제작 방향과는 너무나도 어긋나 상당 부분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데르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유람선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고, 강 가장자리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유람선 갑판 위에 서 있던 관광객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오십 미터가량 더 걷다가 다시 구시가 골목 방향으로 들어섰다.

여기 어디쯤일 텐데.

마이코프스키는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고는 앞장서 걷다가 작은 상점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벽에 붙은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는 여기였군, 중얼거리며 건물을 올려보았다.

여기라고?

한쪽 날개가 부서진 천사의 조각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이코프스키는 상점 문을 열었다. 상점 주인은 나무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예상대로 상점 주인은 야체크 피에카르스키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하루 전과 달리 그의 두 볼은 홍조를 띠었는데 입에서 옅은 보드카 냄새가 났다.

근데 그 사람을 왜 찾는 거요?

전해줄 게 있어서요.

마이코프스키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게 뭔지 궁금하진 않군, 주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대뜸 나를 알은체하며 브로츠와프가 처음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난쟁이 동상이 브로츠와프의 터줏대감이 된 사연부터 시작해 도시의 명소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싶더니 자연스럽게 자기가 파는 물건들로 화제를 돌렸다. 마이코프스키는 건성으로 상점 안을 둘러보고는 주인에게 혹시 부친이 생존해 계시냐고 물었다. 주인은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마이코프스키를 힐끗거리고는 진열장 쪽으로 다가가 난쟁이 동상을 돌려 세웠다.

여기 계시잖소.

그것은 그가 부친을 기억하기 위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이 텅 비어 있었다.

희한하게도 매일 닦아주지 않으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이렇게 얼룩이 생기지 뭐요.

그는 마른 헝겊으로 난쟁이 동상의 등에 핀 얼룩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부친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들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마이코프스키는 주인에게 내가 한국에서 온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자신은 가제타 비보르차의 기자라고 소개하며, 상점까지 찾아오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우주로켓이라, 그거 재미있구먼. 그래, 피에카르스키라는 그 사람에 대해 뭐라도 좀 알아냈소? 


오히려 더 복잡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느 샌가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어쩌면 단지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괜찮다면 보드카 한 잔 하시겠소?

잠깐의 침묵 뒤에 주인이 느닷없이 물었다. 마이코프스키가 내 의중을 살피듯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주인은 백열등 아래의 작은 탁자로 우리를 안내했다. 하루 전에 보았던 것과 달리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지구본의 자전축은 나사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주인이 건넨 작은 잔에 보드카를 받았다. 주인은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켠 뒤에 입을 열었다. 그가 부친과 함께 상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사십여 년 전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하는 걸 힘들어했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심해졌죠. 지난 시간이 당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게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의 부친은 나치 치하 당시 합성고무 생산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생존자였다. 말이 공장이지 허구한 날 학대와 폭행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곳은 학살 공장이었다. 연합군이 승리했지만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부친은 날마다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건 생존자가 치러야 할 또 다른 전쟁이었다. 그의 부친은 매일 밤 꿈에서 여전히 잿빛 수용소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그날, 아버지는 저주 받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게 뭔지 아냐고 물으시더군요. 하마터면 나는 아버지 당신이라고 말할 뻔했지 뭐요.

그 무렵 그의 가족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무려 삼십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주인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작업실로 보이는 곳에서 절인 오이를 조금 내어왔다. 그 사이 마이코프스키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주인은 절인 오이를 담은 작은 접시를 내 앞에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나는 잔을 비우고 절인 오이 하나를 집어 들며 그에게 물었다.

기억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라고 그러십디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이의 시큼한 맛이 코를 자극했다. 이어진 주인의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러곤 내가 빤히 보는 앞에서 별안간 당신의 왼쪽 팔뚝 살을 조각칼로 파내는 게 아니겠소. 망할 노인네. 놈들이 새겨놓은 수인번호를 지워버리면 끔찍한 기억도 사라질 거라며, 그러고는 말려볼 새도 없이…….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이코프스키가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주인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또 한 잔을 들이켰다. 나는 백열등이 비추고 있는 지구본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의 부친이 꾸었던 악몽 속 세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만든 현실이었다. 그의 부친은 피에카르스키와 비슷한 연배였다. 문득 그의 부친이 또 다른 피에카르스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오. 주인이 깍지 낀 손을 풀며 말했다. 아버지도 비슷한 얘기를 하셨던 것 같소. 그래, 기억나는구려. 우주로켓은 아니지만 유에프오인지 뭔지, 그딴 것들을 본 사람들을 만났던 모양입디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들을 술술 늘어놓는데 난 아버지가 점점 미쳐가는 중이라고 생각했지 뭐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던 같소. 그런 게 구원을 가져다주진 않겠지만 뭐랄까,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 같은 일들이 날마다 당신의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데 믿지 못할 까닭도 없진 않았겠지.

문득 박 류드밀라 여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주인의 부친도 구멍 뚫린 지붕 아래 숨죽인 채 누워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주인에게 박 류드밀라 여사의 공책을 보여주었다. 마이코프스키가 그에게 공책에 대한 얘기를 부연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책에 적힌 러시아어를 더듬더듬 읽다가 병기된 글자가 어느 나라 언어냐고 물었다. 내가 한국어라고 알려주자 그가 대뜸 공책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에 딱 하나 없던 게 바로, 이 공책이었거든.

나는 팔 수 없는 물건이라고 말했다. 주인은 오해가 없길 바란다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는 대신 공책을 맡아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공책은 진열장에 놓인 난쟁이 동상 곁에 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어보였다.


다음 날 오전, 호텔 로비에서 마이코프스키를 다시 만났다. 그는 브로츠와프 외곽에 살고 있는 조각가를 취재한 다음 곧바로 크라쿠프로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와 작별인사를 한 뒤 체크아웃을 했다. 일정을 하루 앞당겨 카를로비 바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떠난다는 인사라도 할 겸 상점을 찾았다. 주인은 상점 구석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난쟁이 동상의 빵 조각을 용접하고 있었다.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주인장은 용접봉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반겼다.

안 오면 어쩌나 했는데. 그가 말하길 조금 전에 한 청년이 그 공책을 사갔다는 것이다. 이따금 우리 가게에 책을 팔고 가는 집시 녀석인데, 공책을 보더니 대뜸 자기가 사겠다고 그럽디다. 파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더군. 자기만큼 야체크 피에카르스키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며 버럭 소리치더니 돈을 휙 던져버리곤 공책을 가지고 달아나버린 게 아니겠소.

나는 곧바로 청년이 달아났다는 광장을 향해 달려갔다. 광장에는 아코디언을 어깨에 짊어진 악사가 벤치 위에 올라서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벤치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망연히 광장을 두리번거렸다. 광장 어디에서도 주인이 말한 작달막한 청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야체크 피에카르스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악사의 손놀림은 점점 빨라지고 하나둘씩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광장 구석진 곳에선 낡은 모포를 뒤집어쓴 구부정한 부랑자가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이 든 것처럼 얼룩진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그의 앞에는 눈에 익은 공책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다 난데없이 나타난 벽에 부딪힌 듯 멈춰 섰다. 미동도 없이 이편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또 하나의 난쟁이 동상이었다. 나는 왔던 길을 뒤돌아보았다. 악사가 무어라 소리치자 곁에 있던 고깔을 쓴 두 명의 춤꾼이 폭죽을 쏘아 올렸다. 짙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하늘엔 거짓말처럼 낮달이 떠있었다. 악사의 연주곡은 분명 귀에 익었는데 이상하게도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끝〉

◆ “썼다 지우기 반복… 하고픈 이야기 많아” / 당선소감 - 도재경(본명 강성순)

조금 낯선 하루.

언제나 새벽 버스를 타고 경동시장을 지나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장 풍경은 계절이나 날씨와 상관없이 활기로 가득하다. 버스가 시장을 벗어날 때쯤 내 뒷덜미에 묻어 있던 잠의 자국이 지워진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지우길 반복한다. 일이십 분쯤 흘렀을까, 시계를 보면 한두 시간이 훌쩍 사라져버린 뒤다. 낯선 세계를 방황하는 시간은 즐거우면서도 두렵다. 머릿속을 털어낸다. 일을 한다. 해가 저문다. 도서관을 찾는다. 또다시 글을 썼다 지우길 반복한다. 삼사십 분쯤 흘렀을까, 시계를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사라져버린 뒤다. 밤차를 타고 불 꺼진 경동시장을 지나간다. 

도재경(본명 강성순)
잠이 몰려오는 시간, 일은 글이 되고 글은 일이 된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어쩌다가 이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걸까? 한밤중에 상처 입은 나의 가난한 주인공들을 만난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중얼거린다. 당신들은 패잔병이 아니라고, 그러므로 무릎 꿇지 말라고.

이따금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일단은 친구와 함께 맥줏집을 찾는다. 우리는 지워졌다고 여긴 기억을 되찾고, 되찾았다고 여긴 기억을 두고 나온다. 우린 어쩌다가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친구가 한숨 쉰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아, 당신은 나의 카프카.

J에게 원고발송을 부탁했다. 우체국에서 봉투에 풀칠을 하고 있던 J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미리 축하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풍선껌을 건넸다고 한다. 누구신지 모를 당신에게 인사를 드린다. 나를 있게 한 모든 분과 길을 알려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언제나 나의 첫 독자 벼룩이 J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1978년 경남 함양 출생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 “문장 세련되고 유려… 각고의 수련 느껴져” / 심사평 - 김화영·한수산

소설이 ‘사람의 살아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종심에 올라온 대부분의 응모작이 가지는 공통점은 그 삶이 없다는 점이었다. 삶이 없는 소설들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왜 무엇을 위해 이토록 오래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을까, 의문이 남는다.

어느 카페에 앉아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자판을 두드리면 이런 글이 나올까.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조차 괴로운 일이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인물들이 떠다니는 작품의 무대나 주인공이 학원가나 학원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해서 응모작들은 한결같이 ‘무엇을 쓰려고 한 것일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묻게 만든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가지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 무대, 제목에까지 외래어 혹은 외국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한국소설의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현상이 왜 참신해야 할 신인들에게까지 범람하는 것일까. 당선작도 예외는 아니다.

당선작 ‘피에카르키스를 찾아서’는 주인공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긴 벽’이 담고 있는 ‘과거’와 의혹에 가득 찬 피에카르스키라는 인물의 족적을 더듬어 나가는 ‘현재’를 하나로 교직해 나간다. ‘기억’이라는 주제는 참혹한 과거사를 가진 우리뿐이 아니라 인류의 주제로 현재진행형이 되어 온 지 오래다. 이 작품 역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의 이 재난의 세상에서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꿈을 찾아서 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과 함께 이야기를 침착하게 풀어나간 서술력도 돋보인다. 대화와 지문을 아름답고 간결하게 연결하는 수법에서도 유연하다. 이런 것들이 세련된 문장과 함께 그동안 각고의 수련과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졌을 성취가 이 신인이 지켜낼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저력으로 이어질 것을 믿으면서, 당선을 축하드린다. 기대와 관심을 저버리는 일 없이 정진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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