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한국사의 안뜰] 선교 위해 만든 한불사전… 19세기 우리말 보물이 되다

입력 : 2017-12-02 19:00:00 수정 : 2017-12-02 14:03:5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57> 근대적 한국어사전 ‘한불자전’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는 과거의 사람이 21세기 사람들과 만나 갈등을 풀어가는 설정이 나온다. 이때 과거의 사람들과 대화가 통할 수 있을까. 그 당시의 단어를 풀이한 사전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1880년대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독특한 책이 출간됐다. 19세기 이전 한국인이 사용했던 낱말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근대적 한국어 사전인 ‘한불자전’이다. 한국어 표제어에 프랑스어로 뜻을 붙인 이개어(二個語)사전으로, 707쪽 분량에 달한다. 이 중 615쪽을 차지한 어휘부에는 2만7194개의 표제어가 등장하고, 문법부와 지리부의 표제어는 2만9026개에 이른다. 

과거에서 온 명의와 21세기 흉부외과 의사가 만난다는 설정의 드라마 ‘명불허전’.
tvN 제공
◆선교사 학습용 한불자전의 발행

이 사전은 누가 만들었나. 한불자전의 표지를 보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라고 되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단체인데 교황청의 요청으로 1831년부터 조선 천주교를 관할했다. 그래서 1836년부터 1866년까지 약 30년 동안 22명의 선교사를 조선으로 보내어 조선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는 활동을 벌였다. 천주교를 금지했던 조선 정부는 1839년에 3명의 선교사를, 그리고 1866년에는 9명의 선교사를 처형했다. 하지만 1866년에 모든 천주교 선교사들이 처형당한 것은 아니었다. 3명이 중국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리고 1880년까지 9명이 새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한불자전이 간행되던 당시에 조선 천주교에 소속된 프랑스 선교사로는 12명이 있었다.

1866년에 조선을 탈출한 선교사 3명 가운데 한 명이 리델(Ridel)이다. 남아 있는 그의 편지를 보면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작업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리델은 1868년에 초고 집필을 끝내고 자신이 만든 사전을 출판할 업자를 찾아 헤매다가 1880년에 드디어 일본에서 출판했다. 이것만 보면 한불자전의 저자는 리델이다. 하지만 1866년 처형된 리델의 선배 선교사들, 다블뤼, 푸르티에, 프티니콜라가 남긴 서한을 살펴보면 조선어 낱말들을 수집하여 프랑스어, 라틴어 등 서구어로 그 뜻을 풀이하는 원고를 만들고 있었다. 리델은 선배들이 만든 선교사 학습용 조선어 낱말 풀이집을 가지고 조선어를 배웠으며, 그때 익힌 지식으로 한불자전을 완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19세기 이전 한국인이 사용했던 낱말을 정리한 ‘한불자전’의 표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세기 사람들도 쓰던 익숙한 말과 낯선 말

한불자전의 각 표제어에는 로마자 표기를 붙였는데, 한자에서 유래한 낱말일 경우에는 한자음까지 달려 있다. 마지막에는 프랑스어로 그 뜻을 적어 놓았다. 한불자전에 실린 표제어들 가운데에 19세기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말들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명사도 있지만, 동사나 부사, 형용사 등도 나온다. 가령 ‘계시다’, ‘금명간’, ‘단골’, ‘매몰스럽다’, ‘모내다’, ‘불픠우다’, ‘솔방울’, ‘열쇠’, ‘오히려’, ‘즐겁다’, ‘징검다리’, ‘찰삭찰삭’ 등은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 낱말들이다.

그런데 한불자전에는 낯선 낱말들도 상당수 등장한다. ‘양목경(養目鏡)’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어로 된 뜻풀이를 보면 ‘선글라스, 젊은이들이 쓰는 안경’이라고 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선글라스를 썼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양목경이라는 말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색깔을 넣은 안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물론 한불자전에는 안경(眼鏡)이라는 낱말도 들어 있다.

1828년 연행사가 북경으로 갈 때 따라간 사람 가운데 김지수(金芝?·1787~?)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북경의 문물을 구경하고 한글 가사체로 지은 ‘무자서행록(戊子西行錄)’이라는 여행기에 북경의 리우리창(琉璃廠)에서 양목경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북경을 다녀온 사신 행렬을 통해서 양목경과 같은 서양 물품들이 조선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조선 사람들이 양목경이라는 이름만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에 기묘한 글이 올라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거리에서 좌판을 놓고 장사를 하시던 어느 할머니가 방석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근처 벽에다 방석을 돌려 달라며 이렇게 써 붙였다. “깔고 안진 나이롱 방석 갓다 노라. 안갓다 노면 방법 한다. 방법 하면 손발리 오그라진다. 갓다 노면 안한다.” 그 뒤 한동안 ‘방법’이란 말이 누구누구를 공격한다, 벌준다, 삭제한다 등의 의미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한불자전에는 ‘방법(防法)◈다’라는 표제어가 실려 있고, “병을 쫓기 위해 미신적인 행위를 하다, 병에 이르는 경로를 막다”라고 그 뜻을 풀어놓았다. 즉 19세기에는 주술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나쁜 기운이나 악귀를 물리치는 것을 ‘방법한다’라고 일컬었던 모양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연로한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민속적인 삶의 영역에서는 이 말이 간혹 사용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들은 ‘방법한다’는 말에 주술적인 의미를 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이렇듯 점차 사라지고 있는 19세기 말들을 한불자전에서 찾아내는 것도 쏠쏠하다. 

한불자전에서 ‘방법(防法)하다’는 “병을 쫓기 위해 미신적인 행위를 하다, 병에 이르는 경로를 막다”는 뜻으로 풀이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세기 한국인들이 사용하던 종교 용어들

한불자전을 만든 사람들이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천주교라는 종교를 전파하는 사명을 띠고 조선에 왔기 때문에 종교에 관한 용어들에 무척 민감하였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채집하여 한불자전에 수록한 종교 용어들을 뽑아내면 얼마나 될까. 한불자전 전체를 통독하면서 종교 관련 표제어들을 가려내니 약 1000개에 이른다. 이 낱말들은 대략 세 가지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천주교와 관련한 낱말들이다. 본래 라틴어나 프랑스어 등에서 온 말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17세기 이후 중국에서 한자어로 번역되었다가 18세기 말부터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이를테면 ‘교우’, ‘대부 대모’, ‘신부’, ‘성모경’, ‘칠성사’, ‘연옥’, ‘원죄’ 등이 있다. 이 말들은 새로 만들어졌거나 옛날부터 있었지만 새로운 의미가 첨가된 것들이다.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그렇게 낯설다는 느낌이 없겠지만, 19세기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인 말들이었다.

둘째는 선교사들이 19세기 한국에서 마주친 종교들, 즉 불교, 유교, 도교, 나아가서 무속이나 민간신앙과 관련한 낱말들이다. ‘관음보살’, ‘불공’, ‘윤회’, ‘격물치지’, ‘명륜당’, ‘태극’, ‘옥황상제’, ‘독갑이’, ‘삼신항’, ‘화랑이(覡)’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는 잘못된 정보를 담은 표제어들도 간혹 보인다. 가령 ‘통도사’에 대해서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있는 큰 사찰로서, 많은 불경들이 보관되어 있음”이라고 뜻을 풀었다. 이것은 명백히 오류이다. 게다가 ‘중년(女僧)’과 ‘중놈(男僧)’을 표제어로 실은 것을 보면, 경멸적인 의미를 담은 비속어와 규범적인 어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는 표제어도 보인다. ‘석가모니’에 대해서는 “샤카 집안의 은둔자, 부처의 이름, 샤카무니, 첫 번째 이름은 싯다르타였으며, 주전(主前) 622년까지 80세를 살았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 책을 살핀 종교학자들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한불자전의 어디에도 ‘종교’ 혹은 ‘신앙’과 같은 표제어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말들은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번역된 것이며, 개항 이후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 그러니 개항 이전의 19세기 한국어를 수집한 한불자전에는 당연히 들어 있지 않다. ‘종교’라는 말이 없던 시절에 한국인들은 ‘닦다’, ‘빌다’, ‘바치다’와 같은 종류의 낱말들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이름 붙이는 어떤 것들을 표현했다. 천주교나 불교, 유교, 무속 등 어느 한 군데에만 속한 낱말이 아니면서 19세기 한국인들이 갖고 있던 다양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낱말들을 셋째 묶음 속에 모아 본다면 어떨까. 이런 말들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한불자전의 귀퉁이 곳곳에 숨어 있다.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