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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국민의사 이국종교수의 전쟁 같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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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9 18:00:00 수정 : 2017-08-19 11: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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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살리는 ‘원칙주의자’/ 사고 1시간 내 생사 결정/ 영리 좇는 대학병원서/ 24시간 현장대기 고집/ 고가장비로 병원선 ‘밉상’/ ‘아덴만 작전’때 국민의사로
총상 입은 석해균 선장/ 사망 직전 간신히 회생
이국종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은 “외상센터 인식이나 전문인력이 부족하고 적절한 시스템과 운영철학이 부재해 예방가능 외상환자 사망률이 선진국의 두 배인 35%에 달한다”고 강조했다.
이제원 기자
지난 11일 낮 12시40분 경기도 수원의 아주대병원 내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 현관 앞. 주말 점심시간대지만 수술복 차림의 이국종 센터장과 응급구조팀은 긴장된 모습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119구급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착하자 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구급차 뒷문이 열리기 무섭게 이들은 구급대원들로부터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낚아채듯 인계받아 1층의 외상응급실(T-Bay)로 향했다.

환자는 36분 전인 12시4분 5층 건물 옥상에서 추락해 이미 호흡이 멎은 듯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상태였다. T-Bay에서 경동맥과 호흡을 점검하던 이 교수가 다급하게 가슴절개 명령을 내렸고, 그 자리에서 수술이 시작됐다. 이어 “긴장해!”, “메스!”, “빨리!” 등 이 교수의 고성과 의료진의 분주한 몸놀림이 T-Bay 안을 가득 메운 뒤에야 환자의 혈액이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개소 1주년이 지난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의 일상은 한마디로 죽음과의 전쟁터였다. 의료진은 24시간 대기 상태고, 많게는 하루 13번이나 실려오는 외상환자를 살리고자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일상이 ‘긴급상황’인 셈이다.

수술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얼룩진 흰색 수술 가운, 얇은 금테 안경, 쏙 들어간 볼, 다소 비관적인 말투는 ‘국민 의사’라는 별칭보다는 ‘반항아’ 또는 ‘이단아’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 짓, 정말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 1주기 소회에 관한 그의 첫 마디다.

그러나 외상센터의 중요성과 국내 의료계의 잘못된 관행 등을 이야기할 때는 강한 눈빛에 ‘독기’처럼 날이 선 ‘결기’가 말에 묻어 나왔다. 마치 목에 칼을 들이대도 원칙을 지키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줬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44세 이하 젊은층의 사망 원인 1위인 외상은 사고 발생 1시간 이내(골든아워)에 적절한 조치만 이뤄지면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사례가 대부분”이라며 “외상센터 인식이나 전문인력이 부족하고 적절한 시스템과 운영철학이 부재해 예방가능 외상환자 사망률이 선진국의 두 배인 35%에 달한다”고 밝혔다.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들이 돈이 되는 암센터 등은 앞다퉈 세우면서도 정작 사람을 많이 살릴 수 있지만 돈이 드는 외상센터 설립을 외면하고, 설립된 외상센터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 말이다. 정부가 지정한 응급의료센터임에도 진료를 거부하는 행태나, 국내 4대 병원으로 꼽히는 서울대병원·삼성의료원·서울아산병원·신촌세브란스병원의 외상센터 부재는 이 교수가 가슴 아파하는 사례다.

이 교수는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는 예방 가능 외상환자 사망률을 선진국 수준 이상으로 낮췄고, 외상센터에 온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낸 일이 단 한 건도 없다”고 소개했다. 그 배경으로 의료 장비와 시스템, 의료진의 24시간 현장 대기, 팀워크, 인근 유관기관과의 유기적 관계 등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의 시설과 운영이 국제 기준(World Standard)에 맞춰져 있는 점을 들었다.

경기남부센터는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대학병원 외상센터를 모델로 삼았다. 샌디에이고 외상센터는 중증 외상환자가 도착하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응급처치와 수술을 거쳐 입원까지 하나의 동선에서 원스톱으로 이뤄져 세계적인 외상센터의 기준으로 꼽힌다. 경기남부센터는 이 샌디에이고 대학병원 외상센터의 장비와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한 국내 최초의 외상센터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국비 80억원과 경기도 200억원, 아주대의료원 137억원 등 민관이 함께 투자해 지난해 6월13일 문을 연 경기남부센터는 지상 5층, 지하 2층, 연면적 1만944㎡ 규모다. 이 센터는 외상집중치료 병상 40개, 일반병상 60개, 외상 소생구역 2개소, 외상 전용 수술실 3개실, 외상환자 전용 혈관조영실, CT촬영실, 일반촬영실, 쉼터 등을 갖췄다.

이 센터의 응급실로 불리는 트라우마 베이(T-Bay)는 현관 바로 옆에 설치돼 외상환자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고, 수술에서 입원까지 한곳에서 동시에 이뤄질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이 교수가 이런 시스템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은 의료진의 자세다. 1초가 절박한 외상환자를 위해 24시간 현장에서 대기하지 않고는 이른바 ‘1시간’ 안에 외상환자의 생사가 결정되는 ‘골든 아워’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것을 ‘의료의 선진문화’라고 표현하며 입에 달고 산다. 경기남부센터는 외상외과를 중심으로 흉부외과와 응급의학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교수가 24시간 365일 외상전담팀을 구성해 대기한다. 외상센터 벽에 붙어 있는 “We are here We are waiting(우린 여기 있고 우린 기다린다)”이란 글귀가 구성원들의 정신 자세를 대변한다.

그는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의 경우 중증환자가 응급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지난해 기준 전국 평균이 6.7시간인 데 비해 1.5시간으로 4분의 1에 불과하다”며 “이로 인해 지난해 말 국내 평균 외상예방 가능환자의 사망률을 국내 35.2%의 4분의 1 수준인 9%대로 낮출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환자가 병원에 도착해 응급수술까지 걸리는 시간도 개복수술은 56분, 뇌출혈은 2시간22분, 개방성 골절은 2시간4분으로 전국 응급실의 5분의 1 수준으로 짧다고 덧붙였다.

철두철미한 그의 현장 근무철학은 해군과 함께하는 ‘중증 외상환자 응급조치와 후송 훈련’ 과정의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해군 출신인 이 교수가 제안해 실시 중인 이 훈련은 직접 헬기 레펠을 타고 소형 수상함과 잠수함에 접근해야 하는데, 늘 그가 앞장섰다.

2015년 8월에는 훈련중 헬기에서 잠수함 갑판에 내리다 바다에 빠졌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바로 잠수함에 올라와 훈련을 계속하는 그의 모습에 해군이 놀랐다. 이런 이유로 그는 2015년 해군홍보대사로 위촉돼 명예 대위로 임관한 뒤 지난 4월에는 명예 소령으로 진급했다.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의 시발이자 전국 거점별 권역외상센터 구축은 그 유명한 ‘아덴만의 여명’ 작전에서 시작됐다. 아주대를 졸업하고 2003년 샌디에이고 외상외과에 이어 2007년 영국 로열런던병원 외상센터에서 ‘외상의’ 연수를 받던 이 교수는 귀국해 2010년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의 전신인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센터장에 보임됐다.

센터장 근무 1년이 채 안 된 2011년 1월 삼호주얼리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해적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청해부대의 역사적인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여러발의 총격을 입은 석해균 선장이 오만 살랄라의 ‘술탄 까부스’ 국립병원으로 옮겨져 1월21일(현지시간) 현지 의료진에 의해 1차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26일 두바이를 거쳐 살랄라의 ‘술탄 까부스’ 병원에 도착한 이 교수는 곧바로 수술에 들어간 뒤 에어 엠뷸런스(구급 비행기)를 이용해 석 선장을 아주대 외상센터로 이송해 두 차례의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살리는 데 성공했다.

오만 파견 뒷얘기도 털어놨다. 그는 “서울대의료팀이 현지에 파견된다는 통보를 받고 일상 근무중이었는데, 24일 오후 6시30분쯤 외교부로부터 ‘서울대팀이 못 가니 갈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고 현지에 떠났다”고 말했다. 이어 “현지에 도착해 석 선장의 상태를 살펴 보니 6발의 총상과 파편에 의한 대장 관통상 등 10군데 넘게 몸이 뜷렸는데 상처마다 고름이 터져 나오는 ‘괴사성 급막염’ 상태였고, 관통된 대장의 오염물질에 의한 감염이 빠르게 퍼지며 온몸이 적벽돌색으로 변해 있어 서울대팀의 출국 포기 이유를 추측하게 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괴사성 급막염은 비브리오 패혈증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급막층을 따라 감염이 급속도로 온몸에 퍼져 대부분의 환자가 수시간 안에 사망에 이르는 증상이다.

석 선장을 살리면서 이 교수의 삶에 반전이 이뤄졌다. ‘영리’를 좇는 대학병원에서 24시간 현장 대기와 고가의 장비 등 외상센터의 원칙을 고집하는 이 교수는 병원의 수익성을 악화하는 해고 대상 1호였다. 하루하루가 불안한 상황에서 아덴만의 영웅인 석 선장을 살려내면서 그는 일약 ‘국민 의사’로 전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외상센터의 역할과 중요성을 인식한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그는 골든아워의 중요성과 중증외상분야 시스템이 부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중증외상대응체계 구축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까지 나서 이른바 ‘이국종법’으로 불리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고, 전국 거점마다 권역외상센터가 들어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재 전국에는 16곳의 권역외상센터가 있다. 이 가운데 장비와 의료진 등 이종국법에 의한 기준을 갖춘 9개 외상센터가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돼 운영 중이다. 아주대병원과 부산대병원, 인천 길병원, 원주 세브란스병원, 단국대병원, 대전 을지대학병원, 광주 전남대병원, 목포 한국병원, 울산대병원 등이다. 보건복지부 지정 외상센터의 경우 옥상에 헬리포트를 설치하도록 한 것도 외상환자의 이동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이 법에 명시된 조치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이 교수는 ‘포니정 재단’이 수여하는 ‘2017 혁신상’을 수상했다. 또 ‘낭만닥터 김사부’, ‘골든타임’ 등 방송 의학드라마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는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참전해 왼쪽 눈을 읽고 팔다리를 다쳐 국가유공자가 됐는데, 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고 당시 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특히 국가를 위해 희생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간 병원의 냉대는 충격적이었다”며 “이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기로 한 꿈을 접고 아버지 같은 환자를 절대 홀대하지 않는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가 외상센터를 현대 사회의 필수 안전망으로 구축하려는 청사진은 이때 시작됐는지 모른다.

수원=김영석 기자 lovek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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