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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광고판에 등장한 ‘있다’ ‘잇다’의 우리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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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17 21:18:39 수정 : 2017-07-17 21: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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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의 시대엔 소유냐 존재냐가 철학의 중심이 되었지만 / ‘잇다’의 시대엔 관계가 중심 / 어떻게 맺느냐 따라 운명 갈려 기업의 전쟁은 오늘날 ‘광고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광고는 ‘현대의 대중적 시’이고, 최첨단의 가장 ‘집약적인 영상예술’이기도 하다. 모 전자통신회사의 광고판에서 놀랍게도 ‘있다’ ‘잇다’라는 우리말 소리의 같음과 다름을 이용한 지하철 대형광고를 보고 눈길을 멈추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한글에 내재된 소리의 주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이 무척 반가웠다.

현대 정보화 사회의 모습은 모바일 화상연결의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읽던 ‘눈의 시대’를 넘어서 이어폰을 끼고 사는 ‘귀의 시대’로 들어가 있고, 머지않아 냄새를 정보로 전하는 ‘코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세계는 ‘활자 플러스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 플러스 파동’의 시대이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잡아당겨서 듣는 소리의 시대인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인공지능(AI)의 시대를 넘어서 기계인간의 시대를 상상케 하고 있고, 놀랍게도 세계를 전자전파를 타고 흐르는 ‘소리의 존재’ 시대로 환원시키고 있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이제 ‘있다’의 시대에서 ‘잇다’의 시대가 된 것이 분명하다. ‘있다’의 시대에는 소유냐 존재냐가 철학의 중심이 되었지만, ‘잇다’의 시대는 관계가 중심이 되고 있다. 그것도 실체가 없는 관계의 시대이다. 이제 인간은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고, 행·불행이 좌우된다. 물론 과거에도 어떤 사람과 사물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길이 바뀌곤 했다. 그렇지만 요즘의 ‘관계맺기’는 그런 실체의 관계맺기보다는 전자전파(비실체)의 관계맺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소유의 존재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어떤 사물이나 존재가 정말로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언어적 기억으로라도 소유하고 있어야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면 손(手)으로 잡을 수 있어야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뇌의 기억과 손이 이루는 피드백 과정이 인간생물 진화의 필수요소였다고 형질인류학자는 말한다.

우리는 오랫 동안 사물을 인지하는 것을 이해(理解) 혹은 파악(把握)이라고 말해왔다. ‘이해’는 사물을 합리적으로(이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파악’이란 사물을 손으로 잡은 것처럼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시대는 손으로 잡은 것은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를 잡으면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사물의 이해는 이성으로, 손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스쳐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 전자전파의 흐름으로 수용하면 된다.

실체가 있는 ‘사물’은 이제 실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전자시대는 사물의 인식을 눈으로 보는 것도 포함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더욱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영화 졸업의 주제가인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를 존재로부터 듣는 것은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물질의 세계가 모두 에너지(에너지 불변의 법칙)로 환원할 수 있듯이 이제 세계는 소리로 환원될 수 있는 세계이다. 세계는 이제 ‘사물의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氣: 전기·전자·전파)를 통해 작용하는 ‘기(氣)의 존재’ 시대가 되었다. 전자전파는 오늘날 ‘잇다’의 총아가 되었다.

한국어에서 ‘있다’와 ‘이다’는 이중적 관계에 있다. ‘있다’는 ‘존재하고 있다’의 존재의 의미, 상태의 의미가 있다. 이에 비해 ‘이다’는 사물 사이를 이어주는 ‘잇다’의 연결·관계의 의미가 있고, 동시에 무엇과 무엇이 같다는 ‘동일성’ 혹은 ‘등식(等式)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있다’와 ‘잇다’와 ‘이다’는 불확실성과 확실성의 이중적 의미를 주고받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전자는 실은 서로 대척점에 있거나 모순관계에 있다. 예전에는 기술이라는 것이 특히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었고,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는 데 반해 현대의 전자기술은 중력을 넘어서는 기술 집적체이다. 스마트폰 이외에도 미래 의료산업의 기술은 나노 단위로 구성된 어떤 나노물질이 우리 몸의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서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병균과 병인을 발견하고 치료한다고 한다. 정말 ‘중력이여, 안녕’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권력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별개로 인간의 권력욕과 성욕 등 욕망의 물신숭배에 빠져있고, 그 숭배의 법칙에 따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나노기술은 결국 권력욕과 욕망을 위해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 것이 더욱 더 고도화하고 있는 정밀전자체계의 전쟁무기이고, 전쟁기계이다. 이제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은 스스로 공멸할 가능성마저 있다. 어쩌면 전쟁기계의 요소가 인간성 안에 숨어있었는지 모른다.

인간 공멸의 출발점이 한반도가 될 수도 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인간의 지배와 욕망의 격전지가 되거나 그로 인한 희생물이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존재역운(존재의 역사적 운명)적 사명이다. 모바일 전자시대를 이끌고 있는 한국이 역설적으로 전자정밀무기체계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북한은 어떤 획기적인 ‘잇다’의 관계 맺기를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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