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구로구에서 같은 아파트에 6년째 거주 중인 비혼주의자 김모(54·여)씨는 같은 동 사람들과 아직 인사도 트지 않았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이웃들과 인사도 곧잘 하고 지냈지만 조금만 친해져도 ‘멀쩡한 직업을 놔두고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연’을 캐묻는 이웃들의 호기심에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 함께 사는 직장인 조카는 딸이라고 둘러댔다. 조카는 사람들 앞에서 이모를 이모라 부르지 못하고 ‘엄마’라 불러야 하는 피곤함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사회조사연구기관 월드리서치가 전국 17개 광역시·도(세종시 포함)에 거주 중인 시민들 중 5000명을 무작위로 추출해 조사한 ‘2016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이웃 간의 유대감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이웃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응답자 중 단 2.8%에 불과했다. 이는 2001년 30.8%에서 급감한 수치다. 또 위급상황 발생 시 이웃에게서 도움을 받기 힘들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은 37.6% 수준으로 10년 전(26.3%)보다 11.3%포인트 급증했다. 1996년엔 이웃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답했던 사람들이 14.7%에 이르렀으나 2016년엔 4%만이 이와 같은 응답을 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삶에서 중요한 요소로 ‘행복한 가정’을 꼽는 사람들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이웃과의 관계를 꼽은 사람들은 드물다.

현대사회에서는 피상적이고 짧게 유지되는 인간관계가 증가할 수밖에 없고 잘 모르는 이웃과도 인사 정도는 하는 커뮤니케이션 매너를 기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경향 때문에 일종의 문화지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인 가구의 증가와 함께 사람들의 삶이 다원화된 것 역시 ‘인사하고 지내는 문화’를 약화시켰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지난해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가 발표한 ‘생애주기에 따른 이웃관계의 형성요인과 공간적 특성’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웃관계의 상당 부분이 자녀를 매개로 정보공유 등을 하며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거주자를 대상으로 이웃과 친해지게 된 계기를 설문한 결과 자주 마주치게 된 것이 계기였다는 사람은 전체의 25.4% 수준에 머물렀고 52.0%가 자녀의 학교생활, 유치원 등을 매개로 이루어졌다고 응답했다. 그 외 취미·여가활동은 9.6%, 부녀회 등 주민조직 활동을 통해 이웃관계가 형성된 경우는 3.7%에 불과했다.

김영란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자주 마주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뭔가 공유하는 게 있어야 친해질 수 있다. 예컨대 각자가 키우는 강아지,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매개로 친해졌다고 응답하는 경우도 꽤 있는데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커뮤니티 교류 활동을 증진시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공동 텃밭 가꾸기 등의 행사가 이웃 간 친밀도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보고서들 역시 꾸준히 나오고 있다. 다양한 가구의 등장과 함께 각자의 삶이 다원화하는 만큼 커뮤니티 코디네이터들의 활동 역시 중요하다는 얘기다.
개인주의 문화가 점차 확산하면서 생애주기별로 정해진 과업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전통적 집단주의 규범’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증가한 것도 새로운 원인으로 지적됐다. 나은영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개인의 선택이 다양화하면서 비혼주의자, 애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딩크족, 한 직장에 얽매이지 않는 프리랜서, 늦깎이 취업준비생 등 사람들의 삶이 다양해지고 있는데 커뮤니케이션 예절이 이를 반영하지 못한 까닭도 있다”며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가 다원화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해 지나치게 사적인 부분을 캐묻는 대화는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단순히 이웃하는지의 여부를 떠나 커뮤니케이션의 양식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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