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음악은 나치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장르”

입력 : 2017-07-06 20:40:21 수정 : 2017-07-06 22:59:2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프랑스 원로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 作 ‘음악 혐오’
음악에 죄가 있는가.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69)는 “있다!”고 답한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해야 할 대상이라고 증오한다. 음악의 원형은 죽음과 공포에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본다. 태초의 소리는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눈물, 탄식, 고통, 공포, 경악, 회한, 피 냄새 같은 어둡고 폭력적인 것과 엮여 있다는 것이다. 듣기 좋은 음을 배합하는 기술로 간주하는 음악에 대한 관점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는다. 그는 단적인 예로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며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라고 적시한다. 파스칼 키냐르가 1996년 집필한 ‘음악 혐오’(김유진 옮김, 프란츠)에 기술한 언술들이다.

2002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 그는 음악에 대한 일반의 관점을 뒤흔드는 ‘음악 혐오’로 음악의 본질을 곱씹게 한다.
프란츠 제공
파스칼 키냐르 자신이 첼리스트이자 작곡가였을 정도로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어쩌자고 이처럼 음악에 대해 저주하는 산문을 책 한 권 분량으로 쓰게 됐을까. 그는 “극도로 상처 입은 어린아이 같은 ‘소리’라는 나체를, 우리 심연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그 알몸들”을 우리는 천들로 감싸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 천은 세 종류로 “소나타, 시, 노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배반하리라 예언된 베드로가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시각에 멀리서 들려오는 마지막 수탉의 울음소리에 오열하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베드로의 오열에서 보듯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의 고통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의 동물적 경계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기술한다.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세이렌’.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세이렌의 노래는 “영혼을 붙잡아 죽음으로 이끄는 낚싯바늘”이었다.
마녀 세이렌의 노래를 듣게 되면 모두 죽는다는 예언을 극복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스스로 묶여 마의 구간을 지나간다. 이 상징적인 신화에서 키냐르는 세이렌의 노래는 노래라기보다 비명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오디세우스는 어떤 인간도 죽지 않고는 듣지 못했던 것을 살아서 들었다는 것이다.

“음악은 인간의 육체를 제 쪽으로 유인한다. 이것은 여전히 호메로스의 세이렌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는 제 배의 돛대에 묶여 그를 유혹하는 음악에 포위당했다. 음악은 영혼을 붙잡아 죽음으로 이끄는 낚싯바늘이다. 이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을 일으켜야 했던 수감자들의 고통이었다. 우리는 벌벌 떨면서 음악을 들어야 한다. 벌거벗은 몸들이 방으로 끌려 들어간다. 음악 속으로 들어간다.”

유대인을 학살할 때 마지막 처형장에 음악을 틀어놓은 것은 악마적인 행위였다. 아무리 저항을 해도 소리는 막을 재간이 없다. 눈꺼풀을 닫으면 보이는 것은 외면할 수 있지만 귀에는 눈꺼풀이 없어서 가장 잔혹한 형벌의 수단으로 소리가, 음악이 활용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그리하여 “영혼은 음악에 저항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영혼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음악은 인간의 육체를 강간한다. 음악은 발기시킨다. 음악적 리듬은 신체 리듬을 사로잡는다. 음악이 들려올 때, 귀는 스스로 닫지 못한다. 힘으로서의 음악은 모든 종류의 다른 힘들과 결탁한다. 음악의 본질은 불평등이다. 청취와 복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휘자와 연주자와 복종자. 이것이 음악이 연주되는 즉시 성립하는 구조이다.”

“음악은 몸속으로 침투하여 영혼을 지배한다. 피리는 인간의 팔다리를 움직여 춤추게 한다. 저항할 수 없는, 음란하게 골반을 흔드는 춤이다. 인간의 육체는 음악의 먹잇감이다. 음악은 육체에 침입하고 그를 사로잡는다. 음악은 자신이 지배하는 인간을 노래라는 덫에 가두어 복종하게 한다.”

철학과 소설 사이를 신비롭고 시적으로 비행한다는 극찬을 듣는 노작가. 그가 이토록 음악을 ‘혐오’한 것은 음악에 대한 지극한 애정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차단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음악과의 숙명적인 삶이 그로 하여금 이런 저주를 뱉게 만든 건 아닐까. 매끈하게 다듬어진 음악이라는 이름의 무차별 산업적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음악에 대한 간절한 갈망의 다른 표현인 것은 아니었을까. 옮긴이 김유진의 “노래는, 모든 것을 잃은 한 개인이 철저한 고독의 상태에서 은둔할 때에, 은둔의 순수한 기쁨을 느끼며 어둠이 깔린 강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울 때에 태어난다”는 말은 옳다. 파스칼 키냐르는 ‘나의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적었다.

“화장(火葬) 전에도, 동안에도, 후에도, 음악 없이. 철망에 매달린 매미조차 없이. …그 어떤 끈질긴 소리도 없이.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으로 나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