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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용칼럼] 최치원의 사회통합 정신 되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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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18 21:29:05 수정 : 2017-06-18 21: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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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두품 출신으로 ‘아찬’ 오른 최치원
신라 말기 갈라진 사회 통합위해
제시한 인간 본원 바탕 둔 해결책
다시 새겨 보아야 할 귀중한 유산
통일은 앞으로 우리 민족이 풀어가야 할 막중한 과제이다. 그러나 통일은 목적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인 만큼 신중하고 탄탄한 준비와 진정한 사회통합 정신이 전제돼야 한다. 우리 역사에는 두 번의 통일 경험이 있었다. 첫 번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고, 두 번째는 고려 태조 왕건의 한반도 재통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달성됐다. 그 이후 676년에는 당나라 군대도 몰아내 한반도는 비록 영토가 축소된 한계도 있지만 명실공히 하나가 됐다. 30대 문무왕 때부터 바야흐로 통일신라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36대 혜공왕으로부터 중앙정부의 내부 분열로 신라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56대 경순왕 때까지 신라 하대 21명의 왕위 계승은 무력을 가진 자가 전왕을 죽이고 등장하거나, 아니면 왕권의 위기에 직면해 자결하는 왕이 있는가 하면 불안에 떨다 병들어 죽은 왕도 있다. 왕의 권위는 사라지고 힘으로 왕위를 차지하는 난세가 됐다. 골품제의 폐쇄성으로 인해 고구려, 백제 유민을 아우르지 못하면서 중앙정계는 진골귀족끼리의 정권 쟁탈 각축장이 됐다. 지방행정은 거의 통제력을 잃어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고 호족이 할거했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영산대 석좌교수
최치원은 이러한 시기에 6두품으로 태어나 12세(868년)에 당나라로 유학 가 학식과 견문을 넓혔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경 한림학사에 임명됐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 등 사산비명(四山碑銘)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했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갖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했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 문란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894년에는 국내외의 현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당시 진골귀족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다. 진성여왕도 물러나고 나라는 더욱 분열되고 혼란이 거듭되자 최치원은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마침내 은거를 결심했다.

일찍이 최치원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 본원에 바탕을 둔 사상과 진리의 보편 타당성을 추구함으로써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유교, 불교, 도교의 제 사상을 상호 융합시켜 혼돈된 사회의 인간 교화를 위한 기능으로 삼고자 했다. 공자의 충효를 바탕으로 한 윤리적 실천주의, 노자의 무위자연의 인생관, 석가의 권선징악적 교화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보면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고 한다. 풍류의 도는 가르침을 세울 근원이 선사(仙史)에 상세히 구비돼 있다. 실로 유불선의 가르침이 이미 포함돼 있으니 이로써 군생을 교화시키는 목표에 이를 수 있다” 했다. 잊혀진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화랑도 정신에 기인한 풍류를 바탕으로 접화군생의 사회통합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접화군생의 접(接)은 관계성, 화(化)는 순환성, 군(群)은 다양성, 생(生)은 생명으로 뭇 생명을 가까이 다가가서 사귀어 감화시키고, 변화시키고, 교화시켜 완성단계까지 끌어올리는 숭고한 공동체 정신을 일컫는다. 자연, 만물과 인간의 조화사상에 근거한 포용적 공동체 의식이다.

신라 말기 난마같이 얽히고 갈라진 당시 사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접화군생의 조화 속에서 사회통합의 방안을 제시한 최치원의 사상은 오늘날 다시 새겨 보아야 할 귀중한 정신유산이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영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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