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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유교 박차고 나온 조선의 ‘걸크러쉬’… 동성혼까지 꿈꾸다

입력 : 2017-06-17 16:50:58 수정 : 2017-06-17 16: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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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조선의 여성 영웅들 / ‘칠거지악’이란 성적 억압 시스템 불구, 허난설헌·김만덕 등 주체적 인물 있어 / 19세기부터 여성의식 변화 두드러져 / 여주인공이 적장 베는 ‘홍계월전’부터 / ‘방한림전’선 여성 정체성 집어던지며 남자의 통제 거부… 두 여자 결혼까지 / 소설이란 무대서 시대의 강압 이겨내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규수’라는 용어는 집안의 깊숙한 곳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지 못해 사는 여인이라는 의미인 ‘미망인’도 여성의 사회적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칠거지악으로 대표되는 억압적 시스템은 조선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고 시대와 충돌하더라도 주체적 자아를 지켜나갔던 조선의 걸크러쉬(Girl Crush)들이 눈에 띈다.


최고의 여성 시인이자 중국에까지 이름을 알렸던 허난설헌은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으로 여길 만큼 강한 자아를 갖고 있었던 여성이었다. 여성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김만덕은 제주민을 구휼한 선행을 인정받아 정조가 면천시켜주려 했지만, 오히려 금강산 여행을 청하여 다녀올 정도로 호탕한 여성이었다. 남편과 대등할 정도로 학문적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지식체계를 만들었던 ‘태교신기’의 저자 사주당 이씨와 ‘규합총서’의 저자 빙허각 이씨 역시 당대의 편견을 통쾌하게 무너뜨렸다. 사나이의 뜻을 품고 있으며 여성으로서의 삶 전체를 어항에 갇힌 물고기에 비유했던 기각이라는 여성과 14세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삼호정시단을 이끌었던 김금원 역시 전통적인 유교 이데올로기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성들이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던 조선의 걸크러쉬들은 남성 중심의 시대와 충돌하며 주체적 여성의식을 조금씩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신윤복의 ‘이부탐춘’(嫠婦耽春). 이부(嫠婦)는 과부(寡婦)를 뜻하고 탐(耽)은 즐긴다는 뜻으로 여성의 탐욕 심리를 춘화적으로 그린 작품.
간송미술관 제공
◆고전소설, 여성영웅을 만들어내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의식의 변화가 징후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소박맞은 여성이 오히려 이혼을 요구하는 문서를 관에 제출하는데, 그녀가 내세운 이혼 사유는 남편이 자신과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변화된 여성의식을 수용하지 못한 변사 또는 실정법의 무리한 적용으로 춘향을 억압하고, 민중들은 이를 비판하는 ‘춘향전’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전소설의 서사적 전통은 변화하는 여성의식을 수용하여 여성 영웅 소설을 만들어냈다.

‘이대봉전’의 장애봉은 남자로 변장한 후 여성영웅으로 성장하여 사회적 국가적 역할을 수행하던 중 생물학적인 성이 여성으로 밝혀지고 혼인을 하게 되면서 가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홍계월전’과 ‘정수정전’의 주인공들은 여성으로 밝혀지고 혼인을 한 후에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남편을 부하로 삼아 전쟁터에 나가 적장의 목을 베고, 국가로부터 역할을 인정받는다. 이러한 여성영웅소설은 19세기 조선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데 여성끼리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성혼의 서사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소설 ‘방한림전’은 조선 후기 싹트기 시작한 주체적 여성의식을 반영하여 동성혼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단국대 율곡기념도서관 제공
◆나 역시 남자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


여성영웅소설 ‘방한림전’의 주인공인 방관주는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성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부모 역시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향을 존중해 준다. 방관주는 여타의 여성영웅소설의 주인공과는 달리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스승도 없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나는 비록 여자이지만 남자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찌 세상의 여자가 남편 섬기는 도를 내가 행할 수 있겠는가?” 방관주는 이렇게 외치며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사회적, 국가적으로 최고의 인물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방관주 앞에 개성 넘치는 영혜빙이 등장한다. 그녀는 “여자는 죄인이다. 모든 일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남성들에게 조정을 받게 되므로, 남자가 되지 못한다면 인륜을 그침이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모든 오빠들의 구차함을 비웃는 13세의 소녀다. 오빠들은 이러한 영혜빙의 활달함을 조롱하고 부모는 막내딸의 성격이 이상하다고 여겨 걱정한다. 영혜빙은 혼사가 오가는 방관주를 한 번 보고는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독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방관주와 같은 여성영웅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어 부부의 도리와 형제의 정을 맺고 일생을 마치는 것이 바로 나의 소원이다. 나는 원래 한 남자의 부인이 되어 남편의 통제를 받으면서 남편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화장하는 것을 괴롭게 여겼으며, 부부로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서술자는 이러한 영혜빙의 생각을 ‘기괴하고도 또한 아름다운 일이구나!’라고 정리한다. 방관주는 여성이면서도 남성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아를 실현해 나가지만, 영혜빙에게는 주체적 자아의 형성과 여성의식의 실현에 남성의 모습은 필요하지 않았다. 고전소설을 통하여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동성혼 담론이 펼쳐지게 되었다.

전통시대의 고전소설은 19세기 동성혼의한단면을보여주기도했다.사진은 동성애를 다룬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
영혜빙은 첫날밤을 지낸 후 남편이 된 방관주가 여자임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동시에 평생 함께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이에 방관주는 자신이 남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한 후 평생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지 말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형제의 예로 호칭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영혜빙은 그럴 경우 남들이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전히 부부의 호칭을 유지하기로 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은밀하면서도 치밀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그런데, 결혼을 했으면 자식이?


주변에서는 방관주에게 수염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미소년의 모습을 조금은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이 성 정체성을 의심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혼인 후 자식이 없다는 사실은 그동안 방관주의 외모에 대한 기이함과 함께 주변의 의심을 사기 시작한다. “한 편 벼락 소리와 함께 큰 별이 떨어지니…(중략)…떨어진 별의 광채는 없어지고 한 아이가 놓여 있었다.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이다.” 가을 어느 날 한가한 틈을 타 큰 바위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 한 편을 지어 노래로 부르는데 하늘에서 별과 함께 한 아이가 떨어진다. 방관주는 이 아이를 데리고 와, 이름을 낙성이라 짓고 입양하게 되면서 자식의 문제까지 완벽하게 해결한다. 방관주는 북방 오랑캐를 무찌르는 등 여성 영웅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다가 죽기 직전에 황제에게 여성임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에 황제는 놀라면서도 방관주의 모든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그녀의 희생을 칭찬한다. 결국 방관주는 39세의 나이로 죽게 되고 영혜빙 역시 남편이 죽자 바로 기절하였다 명을 달리한다.

조선시대라는 현실에서는 방관주와 영혜빙의 동성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허구의 공간을 통하여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실천했던 사회적·국가적 역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남성에게 얽매이는 삶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성혼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방한림전’은 조선 후기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던 주체적 여성의식을 반영하여 동성혼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전통시대부터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기록하였으며, 고전소설을 통하여 19세기 동성혼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역사적인 고찰과 현재의 인권을 생각할 때 동성애는 다양한 성적 취향 중에 하나며 옳고 그름, 혹은 찬반의 층위에서 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동성애자를 ‘소수자’로 표현하거나 분류할 이유도 없다. 제도와 충돌하는 동성혼 역시 ‘방한림전’에서 서술자가 말하였듯이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으며, 주인공인 방관주처럼 ‘예법을 어기는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국가)는 이들의 동성혼을 처벌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기이하고 이상하며 또한 기특한 일이라 위로하였다.’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가치의 기준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이와 같은데….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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