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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상처 안고 사는 세상… ‘트라우마’는 문학의 존재 이유

입력 : 2017-06-15 21:10:00 수정 : 2017-06-15 20: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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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철 ‘트라우마와 문학…’ 출간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왕은철(61·사진) 전북대 영문과 교수가 펴낸 에세이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현대문학)은 문학의 트라우마를 천착한 노작이다.

“학문도, 예술도, 문학도 상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상처는 주인이다. 우리가 공손하게 떠받들어야 하는 주인이다. 따라서 학문과 예술과 문학은,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정치와 법을 포함한 모든 것은, 자신이 그 상처를 대변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며 교만해지는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게 된다.”

왕 교수는 기본적으로 ‘상처’ 앞에서 우리 모두는 겸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전제 아래 잘 알려진 서구 텍스트에 감춰진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그가 첫머리에 제시하는 텍스트는 국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그는 이 작품이 어린이가 읽는 동화의 범주에 넣기에는 곤란한 ‘불온한’ 책이라고 본다. 나무와 친구인 소년이 있고, 소년은 자라서 나무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 자신의 열매를 내주고, 더 자라서 결혼하기 위해 집이 필요하다고 하자 가지를 베어가라 하고, 더 나이가 들어 슬퍼서 멀리 떠나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몸통을 베어 배를 만들라고 하고, 늙어 쉬고 싶다고 하자 나무는 그루터기에 앉으라고 한다. 흔히 헌신에 대해 말하는 아름다운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왕 교수는 나무의 트라우마로 시선을 돌린다.


“우리는 조금씩은 너나 할 것 없이, 나무의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도 그것이 트라우마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이를 닮았다. … 나무가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 침묵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나무가 침묵하는 것은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아파서다. 너무 아파서 자신의 감정을 소리나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다. … 나무의 침묵은 겉으로 보기에는 침묵이지만, 실제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는 “우리가 나무의 상처와 침묵에 주목하는 순간,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존재, 다른 사람의 트라우마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서글픈 우화가 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에 동화처럼 소개된 브라질 작가 바스콘셀루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도 끔찍한 폭력을 담은 슬픈 작품으로 분석한다. 아버지와 누나에게 어린 ‘제제’가 수없이 맞고 자란 트라우마가 이 텍스트에는 자욱한데 정작 영미권에서는 냉담한 데 비해 유독 한국에서 열광적으로 익히는 현상을 그는 지적한다. 아이들을 내다버리고, 끓는 물에 익혀서 먹으려 하고, 계모를 죽이는 ‘헨젤과 그레텔’도 동화로 포장된 끔찍한 트라우마의 용광로임을 보여준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서는 트라우마가 가해자에게도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보여준다. 그는 “가해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가해자에게 트라우마가 존재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차단하려 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인지” 경고하면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왜 입은 것이든, 트라우마는 트라우마이고, 따라서 우리가 보듬고 다독이고 이해해줘야 하는 대상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도 세월호 참사를 연상케 하는 가해자의 트라우마로 분석한다. 짐은 낭만적인 태도로 선원이 되기를 희망했고, 일등항해사가 되어 순례자 800명을 태운 낡은 기선에 승선한다. 그 배가 침몰 위기에 빠졌을 때 선장은 선원들만 데리고 탈출하는데 짐은 엉겁결에 그 일행에 합류했다가 두고두고 후회한다. 결국 그가 그 트라우마를 속죄하는 길은 죽음뿐이었을까.

왕 교수는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했던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하며 “타자의 상처와 고통은 중립이 아니라 편파의 대상”이라고 쓴다. 공감의 편파, 환대의 편파, 같이 느끼고 같이 울어주는 편파, 이웃이 되어주는 편파를 그는 호소한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그리스 비극들을 비롯해 오에 겐자부로, 바오 닌, 알베르 카뮈, 귄터 그라스 등의 텍스트를 분석한 ‘상처’들로 자욱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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