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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조선 땅서 43년 의료선교 ‘파란눈의 여인’

입력 : 2017-06-10 03:00:00 수정 : 2017-06-09 20: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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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로제타 홀
최초 여성병원 ‘보구녀관’ 책임자로 부임
광혜여원·동대문부인병원 등 세워 운영
첫 여의사 양성 등 한국 여성 의료에 헌신
맹아·농아학교 설립… 장애인 교육 첫 시도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유명해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1865∼1951)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한국에서 펼친 서양의술은 슈바이처보다 더 헌신적이었다. 1890년부터 1933년까지 43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평양 기홀병원, 광혜여원, 동대문부인병원 등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로제타 홀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를 길러냈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처음 시도하는 등 그의 발자취는 많다.

이 책은 그가 쓴 4권의 일기(1890∼1894)와 2권의 육아일기(1893∼1902) 6권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산하 양화진문화원은 2015년 9월부터 지금까지 모두 5권을 엮어 출간했다. 연말까지 1권을 더 출판, 6권으로 완성할 예정이다. 


먼저 4권의 일기에는 미국 고향집을 떠났던 1890년 8월 21일부터 남편 윌리엄 홀이 타계한 1894년 11월 24일까지의 활동상을 담았고, 나머지 2권은 한국에 낳은 아들 셔우드 홀을 양육하면서 쓴 것이다. 25세의 젊은 여선교사 로제타 홀은 1890년 10월14일 조선에 발을 들여놓았다. 1개월 후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녀관’의 책임자로 일했다. 사실상 첫 여성 진료소 수준이었으며 이름은 명성황후가 내린 것이다. 지금 이화여대부속병원의 전신이다.

로제타 홀은 의료선교 생활 초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로제타 홀(가운데)은 잠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박에스더(조선 최초 여의사)와 그 남편 박유산 부부를 데리고 갔다. 로제타 홀이 안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한국에서 낳은 자녀들이다.
“첫날 진료소에서 4명의 환자를 보았다. 이후 석 달 동안 549명을 진료했고 21번 왕진했다. 진료기록을 보니 피부병, 안질, 귓병 등 50가지 이상의 다양한 질병이었다.” 그는 그후 3년간 1만4000여명의 환자를 치료했다고 기록했다. 1892년 서울에서 결혼한 남편 윌리엄 홀이 평양에 선교사로 파견되는 바람에 홀로 신혼기를 보냈다.

“외과환자 중 한 명은 수탉 한 마리와 암탉 3마리를 보내주었다(수술에 대한 고마움인듯). 16살인 그 젊은 여성환자는 수년전 화상으로 세 손가락이 붙어 손바닥 쪽으로 굽어 자라고 있었다. 마취를 하고 손가락을 분리해 똑바로 펴서 부목을 대주었다. 피부이식이 필요했으나 말이 잘 안 통했다. 나는 몇 조각의 피부를 내 몸에서 떼어내 이식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수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날까지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다음날 그녀를 집에 보냈다.”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 시술한 로제타 홀 여사는 진정으로 조선을 사랑한 서양 여인이었다. 


로제타 홀(왼쪽에서 두 번째)이 1898년 평양에서 문을 연 여성 진료소 ‘광혜여원’의 수술 집도 장면이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서울에서 아들 셔우드 홀을 낳은 뒤 아들을 안고 남편이 있는 평양으로 가 집을 구했으나 심한 핍박을 받았다. 이는 일기에 담겨 있다.

“집을 판 사람과 닥터 홀(남편)을 도왔던 기독교인 김창식(감리교 초대목사) 형제 등이 관아에 잡혀갔다. 당시는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허용되지 않을 때였다. 내 아이의 눈이 파란 것을 보고 ‘사람이 아니라 개’라고 놀림받았다. (관원은) ‘김창식이가 매를 덜 맞게 하고 싶지 않은가? 맞을 매를 감해 줄 테니 엽전 10만냥을 내놓아라. 상감의 명이시다’며 윽박질렀다. 물론 상감의 명이란 거짓말이었다. 관원이 돈을 받아내려는 술책이었다.” 당시 관리들은 선교사들을 윽박질러 돈을 받아내기 일쑤였다.

청일전쟁 와중 평양에서 부상 군인을 치료하던 남편 윌리엄 홀이 과로와 질병 감염으로 순직했다. 1894년 11월24일 결혼 2년여 만이다.

로제타 홀 여사가 여성교육 못지않게 열정을 바친 것은 맹아와 농아 교육이었다. 1894년 조선 최초의 시각장애아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웠으며, 뉴욕식을 참고한 한글 점자도 고안해냈다. 190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아학교도 세웠다.

아들 닥터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난 첫 서양인이었다. 아들 역시 최초로 결핵전문병원을 세웠고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한 사람이다.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에는 조선의 상징인 남대문이 그려져 있었다. 애초 셔우드 홀은 거북선을 넣으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불발됐다.

로제타 홀은 일기에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치료를 강조했다. 그는 탁월한 여성운동가였다. 그가 조선에서 이룬 업적은 신변이 위험할 정도의 극심한 인간적 고통 속에서 이뤄졌다. 이화여대 의대와 고려대 의대 전신을 설립하는 등 국내 의료기관 몇 곳은 대부분 로제타 홀이 시작한 것들이다.

지금 서울 양화진 언덕에는 로제타를 포함해 남편 윌리엄, 아들 셔우드와 며느리,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3살 때 죽은 딸 무덤 등이 있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운영하는 양화진문화원이 관리하고 있다. 로제타 일기 6권과 유품 등은 아들 셔우드의 손녀딸, 즉 로제타 홀의 증손자가 2015년 양화진문화원을 방문해 건넨 것이다. 증손자는 현재 미국에서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아직 로제타 홀 가족에 대해 국가 훈장 등도 추서되지 않고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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