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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가유공자 현주소] 가난으로 내모는 보훈정책…보훈연금도 '쥐꼬리'

입력 : 2017-06-04 18:48:13 수정 : 2017-06-05 07: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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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배상금지’ 헌법 조항에 발목 / 공무수행 중 순직하거나 부상 입어도 국가보상 외에는 배상 요구 원천봉쇄/ 60세 이상이 85%… 빈곤 가속화 우려 / 일부 연금 포기하고 기초생활수급도 / 신체 부상 못지않게 정신적 상처 커 /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치료도 시급
‘따뜻한 보훈.’ 보훈처 역사상 첫 여성 처장의 취임 일성이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보훈가족이 중심이 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정부의 첫 보훈처장이라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피 처장의 바람대로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가유공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배상을 가로막은 헌법조항이 건재하고 쥐꼬리만 한 보훈연금은 가난에 짓눌리는 유공자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말이 좋아 국가유공자지, 무엇 하나 제대로 돌봐주는 게 없다”고 울분을 토해내는 유공자들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은 이유이다.

◆기본권 침해하는 ‘이중배상금지원칙’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를 하던 오모(28)씨는 2010년 8월 유해발굴작업을 하다 두통과 구토 증상을 호소하며 쓰러져 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군 병원에서는 3개월 동안 병명을 확인하지 못했다. 11월에서야 결핵성 뇌수막염 진단을 받은 오씨는 민간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너무 늦었다. 팔, 다리는 마비되고 의사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오씨의 부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벌였다. 군 병원에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결핵균이 잠복기를 지난 이후에 민간병원으로 옮겨 병을 키웠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그러나 법원은 군 병원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에 배상책임이 있지 않다고 판결했다.

헌법 29조2항 ‘이중배상금지원칙’ 때문이었다.

이 원칙은 공무를 수행하던 중 순직하거나 부상을 입어도 법률이 정한 보상 외에는 국가나 공공기관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한 제도다.

오씨처럼 이미 국가유공자법에 의한 보상을 받고 있으면 국가의 과실이 명백해도 배상을 요구할 수 없도록 한 것으로 상이군경의 기본권과 평등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이중배상금지원칙은 ‘유신헌법’의 잔재다. 관련 법률이 시행된 것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7년 3월 참전 군인들이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다 숨지거나 부상을 입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경우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는 것을 미리 막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본권과 평등권 위배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고 1971년 대법원에서 위헌 결정까지 나왔다. 그러나 1972년 유신헌법에 포함된 뒤 줄기찬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헌법의 보호막에 싸여 생명을 유지했다.

이광윤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이 때문에 국가유공자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다면 평등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며 “개헌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쥐꼬리 연금에 빈곤의 악순환

많은 유공자가 가난에 허덕인다. 장애 탓에 일을 하기가 힘든 데다 보훈연금은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김병열(87)씨는 당시 수류탄을 맞아 부상을 입은 국가유공자다. 김씨가 한 달에 받는 연금은 고작 50만원. 고령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어 한 달 소득의 전부다. 그런데 이 연금을 받는다고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김씨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의료비가 지원돼 오히려 연금을 포기하는 게 나을 수 있다”며 “유공자들 중 일부는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4일 국가보훈처와 국회입법조사처 등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보훈연금을 받는 85만8859명 중 38만2192명(44.5%)이 4인가족 도시근로자 가계소득 수준인 월 403만7000원보다 적은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13만6038명은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 미만이었다. 전체 보훈연금 수령자의 85.3%(73만2904명)는 60세 이상으로 노동력 상실에 따른 빈곤 가속화 우려가 제기됐다.

◆사실상 방치되는 PTSD

김모(57)씨는 1984년 경기도 연천에서 군복무를 하다 당한 지뢰폭발 사고를 잊지 못한다. 사고로 왼쪽 다리가 파열되고 오른쪽 안면부와 청각이 마비됐다. 정신적 후유증도 극심했다.

그는 사고 후 30년이 넘도록 편하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눈만 감으면 사고 당시가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악몽에 시달리다 한밤중에 괴성을 지르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많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원인이었다.


PTSD는 전쟁이나 천재지변, 사고 등을 겪은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이다.

김씨는 유공자가 됐으나 사고 당시 군 병원에서 진단을 내려주지 않은 PTSD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PTSD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겨내라’, ‘극복하면 된다’고 하지만 아무도 겪어보기 전에는 그 고통을 모른다”고 말했다.

심리학자들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나 큰 사고를 당한 사람의 90%가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절반가량이 PTSD를 겪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PTSD가 질병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부터였다. 이전에는 PTSD 증상을 보여도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정신력이 약한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지금도 미흡하다. 전국 5개 보훈병원에 PTSD를 관리하는 전문의는 모두 합쳐 6명에 불과하고 간호사를 포함한 전체 의료진 수는 17명이다. PTSD 증상을 보이는 환자와 원인에 대한 자료도 극히 드물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경우 28만8737명 중 15%인 4만3000여명이 지금까지 PTSD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수희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PTSD는 일상생활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고 심하면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PTSD 증상 초기부터 관리해 치료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범수·배민영 기자 sway@segye.com, 사진=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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