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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중화질서 뒤집은 판타지 소설… 현실의 對中관계 곱씹게 해

입력 : 2017-05-28 09:00:00 수정 : 2017-05-27 16: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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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판 걸리버여행기 ‘태원지’ 영조는 요샛말로 ‘소설 덕후’였다. 그는 소일거리로 소설만 한 게 없다고 말하고, 신하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또 신하들에게 작가에 대해 묻는가 하면, 보고 싶은 소설은 중국행 사신에게 구해오라고 명하기도 했다.

1769년 10월 영조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을 접견한 자리에서 특별한 명을 내린다. 소설 ‘탁록연의’, ‘남계연담’을 사 오라는 명이다. 왕명을 받은 사신 일행은 북경 책방을 이 잡듯 뒤지지만 끝내 빈손으로 돌아온다. 3년이 지나도 책을 구하지 못한 영조는 1772년 11월, 잊지 않고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에게 똑같은 명을 다시 내린다.

조선판 걸리버여행기로 불리는 ‘태원지’는 조선을 찾다 표류하게 된 ‘임성’과 호걸들의 탐험을 다룬 해양 판타지 소설이다. 사진은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북경에 도착한 사신은 두 소설을 구했을까. 사실 ‘탁록연의’와 ‘남계연담’은 중국에서 구할 수 없다. 조선 소설이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다뤘던 까닭에 영조는 중국 소설이라 여겼던 것이고 내막을 알 길 없던 사신은 열심히 발품만 팔았던 셈이다.

영조뿐만 아니라 아들 사도세자, 손자며느리인 정조의 비빈까지 소설을 애독했다. 임금에서 비빈까지 두루 애독했던 왕실 소설은 창덕궁 연경당, 낙선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소장처가 낙선재였던 까닭에 왕실 소설을 ‘낙선재본 소설’이라 부른다. 낙선재본 소설은 창작소설과 번역소설을 더해 84종 2000여책에 달한다. 문학적 성취가 높은 훌륭한 작품이 많아 조선 서사 문학의 정수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낙선재본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다. 조선판 걸리버여행기 ‘태원지’다. ‘태원지’는 조선을 찾아가다 표류하게 된 주인공 ‘임성’과 호걸들의 탐험을 다룬 해양 판타지 소설이다. 걸리버가 소인국에서 거인이 되고 거인국에서 소인이 되었듯,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했던 임성과 호걸들은 더 큰 세상에 발을 디디며 입장을 바꿔 오랑캐로 전락한다. 중국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지금, ‘태원지’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태원지.
‘태원지’가 쓰인 18세기, 조선 지식인이 잡은 화두는 단연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오랑캐인 동시에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 중국이었다. 조선 지식인은 하나의 청나라를 두고 삼전도의 치욕을 곱씹기도 했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제국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전자는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 연호를 고집하며 청나라를 무찌르자고 부르짖었고 후자는 청나라를 명실상부한 중화로 여기며 발전상을 인정하고 탐구했다.

1766년 봄, 연행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자신이 본 그대로 청나라의 번영을 알렸다. 홍대용이 청나라 문인과 교류한 사실을 안 김종후는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에서 머리 깎은 거자(擧子: 과거 준비생)와 사귀었다며 홍대용을 질타했다. 그는 홍대용에게, 명나라와 맺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를 무찌르고자 했던 송시열 선생을 떠올리라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편지로 진행한 토론은 좁힐 수 없는 간격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후 홍대용은 이 논쟁을 소재로 철학소설 ‘의산문답’을 쓴다. ‘의산문답’에서 실옹은 중화의식에 찌든 허옹을 일깨운다. 실옹은 말한다. 하늘의 시각에서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은 없으며 문화의 높고 낮음 또한 없노라고. 
태원지 첫장.

오랑캐와 말도 섞어선 안 되다며 홍대용을 몰아세웠던 시대, ‘의산문답’보다 더 일찍 화이질서를 정면에서 반박한 작품이 있다. 바로 조선 왕실에서 읽은 낙선재본 소설 ‘태원지’다. ‘태원지’는 당연하게 여겼던 중화와 오랑캐의 위치를 뒤집어엎는다.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게 당연할 터. 그러나 ‘태원지’는 미지의 대륙 ‘태원’을 내세워 중화질서를 무색하게 만든다. ‘태원지’ 주인공 ‘임성’은 중국인이다. 그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품은 영웅이다. 그의 곁에는 천문지리에 달통한 군사(軍師) 종황, 산을 뽑을 기개를 지닌 장수 임응 등 많은 호걸들이 함께한다.

임성과 호걸들은 원나라를 몰아내려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다. 한창 세를 불리던 임성 일행은 원나라 조정에 발각되며 위기에 빠진다. 중화가 오랑캐를 무찌르는 게 ‘하늘의 이치’라면 승리는 당연히 임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원지’는 그렇게 풀어나가지 않는다. 원나라 군대가 진격해 오자 임성 일행은 변변한 전투조자 못한 채 도망친다.

임성 일행이 도망가려던 곳은 조선이다. 동방예의지국인 까닭에 중화인이 머물 만한 나라라는 주장에, 군사 종황이 반대하고 나선다. 조선은 재난이 많은 작은 나라라 중원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태원지’는 조선 소설이면서 조선에 대해 냉정하다. 또 냉정한 만큼 객관적이다. ‘태원지’ 속 조선은 동쪽에 치우친,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나라에 불과하다. 현실 속 조선도 마찬가지다. 조선에게 청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도모할 역량 따위는 없었다.

임성 일행은 급히 배를 띄워 조선을 찾아가지만 곧바로 풍랑을 만난다. 그들은 바다를 떠다니며 괴인 응천대장군이 다스리는 섬, 요괴 쥐가 사는 섬, 괴물 원숭이가 사는 섬, 사람을 삼키는 거대한 구렁이가 사는 섬, 천년 묵은 여우가 사는 섬 등을 거치며 표류를 이어간다.

끝 모를 표류를 거듭하던 임성 일행은 이름 모를 곳에 도착한다. 겁을 먹은 임성 일행에게 원주민은 대륙의 이름이 ‘태원’이며 그 크기가 10만여 리, 역사는 수만 년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태원은 목·화·토·금·수 다섯 대국과 무수한 소국이 있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륙이라는 것이다.

“태원은 천하의 가운데 땅이오.” 중국을 모르는 태원 사람은 ‘태원’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태원 사람이 중국은 어떤 나라인지 묻자 종황은 천지개벽에서 원나라 건국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를 설명한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중국의 흥망성쇠를 모두 듣고 난 태원 사람은 길게 탄식하며, “어찌 이렇듯 홀연히 망하고 흥하여 백성을 전쟁 가운데 내모는 것이오? 우리 태원은 그렇지 않소.” 찬란하다고 자부하던 중국 역사는 중국을 모르는 태원 사람이 보기에 백성이 고통받는 잔혹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며 중화인으로 자부했던 임성 일행은 충격에 휩싸인다.

오랑캐 원나라를 몰아내려던 임성 일행은 태원에 이르러서 도리어 ‘오랑캐’가 된다. 태원 사람들은 임성 일행을 ‘도적떼’나 ‘해적’ 취급을 한다. 태원 사람은 중국을 모를뿐더러, 임성 일행이 태원의 침략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에게 원나라가 그러했듯, 태원 사람에게 임성 일행은 먼 곳에서 들이닥친 침략자였던 셈이다.

임성 일행은 약소국 가운데 하나인 서안국을 병탄하며 전쟁의 서막을 연다. 임성의 군대가 다섯 대국 가운데 하나인 토국에 이르자, 토국 조정은 항복과 항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대세가 기울었으니 항복하자는 쪽이 있는 반면, 해적에게 복종할 수 없다며 항전을 주장하는 쪽도 있다. 토국 왕이 항복을 결심하자 충신 홍민관은 칼을 빼어든다. “신하가 돼서 사직을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죽음을 아끼겠는가! 옛 충신과 열사를 좇아 저승에서 노님이 마땅하도다.” 말을 마친 홍민관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치욕을 감당할 수 없던 토국 태자도 처자식을 모두 죽인 뒤 종묘에 들어가 목을 맨다. 토국 태자의 비극적 죽음은 명나라 숭정제를 떠올리게 한다. 명나라 마지막 임금 숭정제는 북경이 함락되자 비빈과 공주를 모두 죽이고 스스로 목을 맸다. 이로써 신대륙 태원에서 임성 일행의 정체성은 분명해진다. 임성 일행은 전쟁의 참화를 불러온 해적이자 오랑캐이다.

‘태원지’는 서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는 신대륙 태원과 중국을 설정해 내부자와 외부자의 자리를 바꾼다. ‘태원지’ 마지막 장을 덮으며 조선 지식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 번쯤 깨어있는 시각으로 조선과 청나라를 바라봤을 터. 소설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지금 중국의 패권주의는 막무가내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우방이라던 미국은 엄청난 방위비 분담금을 갈취할 태세다. 서로 세상의 중심이며, 자신이 주인이라고 고집하는 모습이다.

엄혹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인식은 그 어디쯤 있을까. 혹시 지난 세기 중국과 미국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냉철한 시선으로 직시할 때이다. 18세기 소설 ‘태원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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