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은 수신(修身)이고, 제가(齋家)였다. 이 때문에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한 관리자에게 직접 벌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들에게 과거시험을 치를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조선 당대에 이미 명재상이라고 칭송되었고 청렴한 관료의 표상이었던 황희에 대해서도 실록에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다’고 평한 기록이 있다.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이 한마디 평가는 그의 명예에 오점이 되었다. 이렇게 관료의 청렴도와 집안 단속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이정의 신위를 모신 사당. 묘소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사당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93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건물은 178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
조선 건국 초, 왕권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권근과 같은 관료들은 종친(왕의 친족)이나 부마(임금의 사위)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를 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이 그들을 총애하여 일과 권세를 맡겼다가 범법행위를 하게 되면 그들을 처벌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왕실의 화목을 깨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종친과 부마에게는 그들의 품위를 유지하여 왕실의 위엄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경제적 지원을 후하게 하는 대신, 나라의 일은 맡기지 않는 것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길이었다.
이러한 명분에 따라 조선은 양반 관료와는 별도로 품계와 관직 체계를 만들고 종친은 종친부에, 부마는 의빈부에 소속시켰다. 이 관청들은 의정부와 같은 등급이긴 하지만 업무는 따로 없었다. 종친이나 부마는 사신 접대나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등의 외교 의례를 비롯한 각종 국가 의례에 참여하게 했다. 종친이 다른 관청의 수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왕자들은 종부시, 사옹원, 상의원 등의 제조를 겸했다. 종친은 지방에 내려가 종친이란 신분으로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있어 도성을 벗어나 살 수 없었으며 각종 의례에 참석해야 했다. 또한 양반 관료들과 교류가 많은 것도 사람들의 의혹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삼가야 했다.
성종은 형인 월산대군과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죽은 뒤 시문들을 모아 ‘풍월정집’을 편찬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아들인 의경세자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맏아들인 월산군이 왕위 계승권자로 지정되어 학문에 힘쓰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의경세자가 사망한 후 어린 월산군 대신 세조의 둘째아들이 왕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종친으로 살아가야 하는 월산군과 자을산군에게 자신들의 한계를 일깨워 주었다.
따지고 보면 세조 자신도 세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종친으로 왕권을 굳건히 보필해야 했지만,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장본인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친 세조였지만 어린 손자들에게는 종친의 역할을 강조했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조부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월산대군은 굴곡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종의 형으로 남아 종친으로서의 지위를 잘 지켜냈다. 1455년 세조가 왕위가 오르자 도원군은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뒤 스무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때 남겨진 월산군과 자을산군을 세조는 가까이 두고 돌봤다. 특히 월산군은 총명하여 세조가 매우 총애하였다고 한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의경세자가 사망한 이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이후 1468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예종이 사망하자 왕실에서는 왕위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있고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군이 있는데도, 왕위 계승 서열이 가장 낮은 자을산군을 왕위계승자로 낙점하였다. 정희왕후의 주장은 제안대군은 어리고 월산군은 병약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구나 세조가 생전에 “자을산군에게 군왕의 자질이 있다고 칭찬하였다”며 그를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그의 모후인 소혜왕후와 한명회 사이에 모종의 정치적 결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을산군인 성종은 왕위에 오르자 부친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숭하고, 형인 월산군은 월산대군으로 봉작하였다. 제안대군이 너무 어려 예종의 뒤를 이을 수 없다면 월산대군이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는 왕이 될 수 있었던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종친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형 대신 왕위에 오른 성종은 월산대군을 왕자의 예로 대우하고 궁궐의 각종 행사에 그를 초청했다. 또한 월산대군이 사냥을 갈 때에는 군사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성종은 형을 궁궐로 부르기도 하였지만 월산대군의 사저에도 자주 방문하였다. 그는 월산대군이 새로 지은 작은 정자에 ‘풍월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관료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성종과 월산대군은 많은 시문들을 주고받았으며,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에 성종은 그 시문들을 모아 월산대군의 시집인 ‘풍월정집’을 편찬하게 하였다.
월산대군은 왕의 형이란 지위를 내세워 얼마든지 세도를 부릴 수 있었지만 동생의 예우에 대해 겸덕으로 답하였다. 왕자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문소전이나 종부시 제조 자리와 같은 관직도 마다하였다. 날이 더우나 추우나 매일 아침 궁궐에 나가 동생인 왕에게 문안을 드렸으며, 사석에서 성종을 만나도 행동거지가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왕실 문인 중에 으뜸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그렇기에 그는 문사(文士)들과의 교류는 좋아했지만, 함부로 사람을 만나지 않아 그의 집 문 앞이 적막하여 드나드는 거마가 없었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서 왕위에 있는 동생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조정의 언관들은 성종의 지나친 월산대군 사랑에 대해서 간쟁을 한 적은 있으나 월산대군의 행실에 대해 비난한 적은 없었다. 월산대군과 성종은 그 형에 그 아우였다. 형은 최선을 다해 종친으로 살았고, 동생은 최선을 다해 국왕으로 살았기에 성군(聖君)의 명성을 얻었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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