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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우리 시대 아픔 투영… 내 문학은 멍든 삶에 대한 항변”

입력 : 2017-04-10 21:00:00 수정 : 2017-04-10 2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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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자기 앞의 生’으로 돌아온 소설가 윤정모 “교과서에는 다 묻혀 있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세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면 소설도 성긴 건물 같잖아? 나중에 교과서에도 쓸 수 있게 나라도 다음 세대에게 오목조목 짚어주자는 마음으로 치밀하게 자료를 찾았는데 아직도 덜 찾은 게 많아.”

소설가 윤정모(71)를 20여년 만에 인터뷰를 한 건 그가 최근 펴낸 장편소설 ‘자기 앞의 生’(문학행동·사진) 때문이었다. ‘촛불민주주의 시민혁명 운동 전사(前史)’라는 부제를 붙인 이 책이 출간된 날은 공교롭게도 지난달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날이었다. 이 소설에는 광복과 미소군정, 6·25전쟁, 4·19, 7·4남북공동성명, 광주민주화항쟁, 남북평화축전, 6월항쟁, CIA가 공개한 비밀문서, 실존인물의 수기, 학생운동 등 세밀한 현대사와 자료들이 종횡으로 촘촘히 직조됐다. ‘촛불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 한국 현대사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구체적인 세목을 젊은 세대에게 소상히 전해주는 미덕을 간직한 소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미국 교포사회에서 평화운동을 벌이는 일꾼들의 현주소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미국 교포사회의 도움으로 취재하고 자료를 확보해 4년에 걸쳐 한국 현대사의 세목을 충실하게 장편에 담아낸 소설가 윤정모. 그는 “초등학교 때 장문의 항의편지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 같다”면서 “나에게 문학은 말로는 정리하기 어려운 것을 일목요연하게 짚어서 전달할 수 있는 고급 언론”이라고 말했다.
이재문 기자
윤정모를 처음 인터뷰를 한 건 ‘1980년대 문제작’을 돌아보는 시리즈에서 이른바 한국 최초의 ‘반미소설’로 꼬리표가 붙었던 문제작 ‘고삐’의 현장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그가 30여년이 흐른 뒤 미국 교포사회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격정의 시대에 최초로 터져나온 반미소설 ‘고삐’는 작가 자신의 ‘소설 같은’ 가족사를 그 시대의 예민한 성감대와 결합시켜 1980년대를 거론할 때는 빠질 수 없는 작품으로 생명력을 확보했다.

“반미작가라는 꼬리가 붙어 다녀서 한동안 후회를 많이 했어. 내 소설 때문에 다친 학생들도 많고 잡혀가서 고생도 많이 해서 마음이 아픈 데다 북한이 하는 꼬라지도 그렇고…. 내가 잘못 했나 싶은 생각을 하다가 오랜 침체기를 거쳐 요즘 와서 보니 잘못한 게 아니라 이게 내가 타고난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100만부 넘게 팔려나간 ‘고삐’가 윤정모라는 작가를 널리 각인시킨 대표작이라 해도 토를 달기는 어렵지만 정작 그가 먼저 써낸 의미 있는 작품들은 많았다. 폐간과 판매금지가 횡행하던 1980년대 초반 신군부의 엄혹한 독재 치하에서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던 광주민주화항쟁을 처음으로 소설 ‘밤길’(1985)에 담았던 이도 그이였다. 한국 소설에서 최초로 위안부의 피해 현장과 상황을 장편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1982)에 구체적으로 등장시킨 작가도 그이였다.

“임종국 선생이 쓴 정신대 실록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선생님을 찾아갔어. 너무 분해서 간 건데 선생님이 소설로 써봐라, 니가 할 일은 그거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쓴 건데 1990년대 초반까지도 피해국에서 위안부를 다룬 건 그 소설밖에 없었다고 해. 당시 일본 반전운동가와 호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본 만행사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고생한 할머니들 생각을 하면서 버텼어. 근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 그림을 수록한 내 동화 ‘봉선화가 필 무렵’을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 주요국가 도서관이나 학교에 보내 피해사실을 알려왔는데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에 올려 지원금을 끊어버렸지.”

사실 그의 위안부 소설은 1980년대 초반에 썼는데 뒤늦게 조명을 받은 것이다. 그 소설을 출간할 즈음에 윤정모는 광주항쟁 수배자 1, 2호인 윤한봉 박효선 같은 이들을 숨겨주는 ‘하숙집 주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운동권’이나 ‘참여작가’와는 전혀 연관이 없었던 ‘안전한’ 작가여서 광주의 ‘송백회’에서 지인을 거쳐 수배자 은신을 부탁한 것이었다. 엉겁결에 3년 동안 맡았던 이 일은 윤정모의 작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변곡점이었다. 숨겨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문학과 세상에 대해 눈을 떴고 그가 최초로 써낸 광주 관련 작품 ‘밤길’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영화배우 최무룡에게 빠져 ‘명랑’이나 ‘아리랑’ 같은 잡지에 나온 시나리오를 베껴 그를 만나러 친구 세 명을 규합해 무작정 상경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을 왕따시키는 친구의 엄마에게 장문의 항의편지도 썼다고 했다. 당돌하고 분방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정작 그 배경은 쓸쓸하다. 태어나서 단지 두달 반 동안 엄마와 살았고 나머지는 내내 극진한 사랑을 베푼 외할머니 밑에서 컸다. 바람기 많은 엄마는 시댁에서 쫓겨나 여러 남자들을 전전했으며, 나중에는 출판사 일과 삼류소설 재구성 작업으로 돈을 벌어 엄마 뒤를 봐줘야 했다. 불우했지만 자유로웠고 외할머니의 사랑만큼은 듬뿍 받았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소설가 오정희 송기원, 시인 이시영 감태준 등과 수학했다. 대학시절 맥주집 서빙을 비롯한 각종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생계를 해결하다가 졸업을 하기도 전인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냈다. 단지 돈을 받기 위한, 이른바 제도권 문단의 등단 절차와는 관련이 없는 출판행위였다. 이후에도 라디오 연속극 따위를 소설로 각색하기도 하고 대히트를 쳐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광화문통 아이’ 같은 소설들도 썼지만, 이른바 ‘제도권 문단’에서 등단으로 쳐주는 작품은 한참 늦은 1981년 ‘여성중앙’에 당선된 ‘바람벽의 딸들’이다. 이마저도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줄 당시 그중 한 명이 돈을 만들자고 적극 제안해 엿새 만에 써낸 작품이었다니 윤정모는 한국 작단의 이단이었던 셈이다. 여대생 애정소설이나 쓰는 삼류작가라고 누군가 독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니, ‘광주’가 그녀를 작가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는 말이 실감날 수밖에 없다. 이후 위안부, 광주, 반미를 거쳐 1990년대에는 한민족 대서사시를 그려낸 ‘수메르’ 연작을 쓰는 세계로 나아갔다.

“나는 밥 세끼 먹을 정도만 되면 글 안 써도 혼자 노는 걸 참 잘하는데, 아 정말 쓰고 싶지 않은데 또 쓰게 되는 거야. 왜 그런지 몰라. 누가 시키는 것 같아. 사실 사는 게 별로 재미없어. 특급열차를 타고 내 생명이 빨리 종점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내가 죽어도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유언장에도 써놓았어. 내 문학은 사실 멍든 삶에 대한 항변 같은 게 아니었을까.”

다시 어떤 작품을 구상 중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허전했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면서 “한 개인의 앞에 놓인 생은 저마다 각자 책임지는 것이지만 그 개인의 운명을 둘러싼 환경을 바꾸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했다. 윤정모는 탄핵이 가결된 후 “올해는 역사와 교과서가 바로잡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참된 민주국가, 그 원년이 되게 하소서”라고 인쇄가 끝난 ‘자기 앞의 생’ 서문을 황급히 바꾸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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