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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 시대에 금기시된 죽음…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

입력 : 2017-04-07 09:00:00 수정 : 2017-04-06 20: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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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형의 미래학 향연] 〈21〉 죽음의 미래학
티베트 지역에서는 천장(天葬) 또는 조장(鳥葬)이라는 장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새에게 먹여 없애는 장례인데, 주로 독수리에게 먹인다고 한다. 가끔 TV를 통해서 천장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라 한다. 사실 생각해 보니 새에게 먹이는 것이 가장 하늘나라에 가까이 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죽은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땅에 묻어서 썩히는 매장, 물에 넣어서 물고기에게 먹이는 수장, 불에 태워 없애는 화장, 화장해 나무뿌리에 묻어주는 수목장 등으로 다양하다. 요즘에는 시신에서 추출한 탄소를 이용해 인공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들어 끼는 방식도 있고, 시신의 탄소로 연필심을 만들어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서 영원히 함께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장례 방식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죽음에 대한 인식의 표상이 바로 장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든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은 영생을 위한 길이라 믿었으며, 산 사람을 함께 땅에 묻어 순장한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이라 생각한 것이다. 새에게 먹여서 하늘을 날게 해주는 천장은 하늘나라를 믿는 사상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주로 관념론과 존재론의 두 갈래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관념론은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형성된 관념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주장이다. 아무리 새로운 지식이나 사상이 출현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인식의 틀을 갖고 있어야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사물의 존재는 나의 관념을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비해 존재론은 나의 의식보다 외부의 존재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사물이 외부에 존재하면 나는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루소의 사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생명활동이 정지돼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생물학적인 종말을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심장고동과 호흡운동의 정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생태로 전이됨을 말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간접적 체험을 상상하고 고찰함으로써 죽음을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들은 죽음의 의미와 해석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많은 철학자들은 죽음이란 결코 남과 바꿀 수 없는, 반드시 자신에게 찾아오는, 그리고 그것을 초월해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죽음을 보는 관념론과 존재론

만약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고 되돌아 와서 그 세상을 설명해 줄 수 있고, 또는 각자 체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공포가 크지 않을 것이다. 일부 죽음의 세상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키리아코스 마르키데스가 지은 책 ‘지중해 성자 다스칼로스’에 나오는 다스칼로스는 인간에게는 육체와 심령이 있다고 말하며, 심령은 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존재로 본다. 그는 심령은 육체를 벗어나 공간을 초월해 돌아다닐 수 있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러한 체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은 특별한 수행으로 훈련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기에 일반적인 과학적 가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과학적인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실험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이나 영혼의 이탈은 아직도 우리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죽음을 보면 매우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심장과 호흡이 멈추었으니 삶의 종말이 온 것이다. 죽음 이후의 세상은 보지 않았기에, 더 이상 다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수행 방식이나 도구가 개발돼 아무나 죽음을 체험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바뀔 수 없다. 그러나 관념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의 인식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음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그에 맞게 죽음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장례의식을 치르게 된다. 그런데 전 세계에 다양한 장례 방식과 종교를 보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아무래도 관념론적인 경향이 강해 보인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서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래학은 미래를 대비하는 것

왜 미래학을 공부하는가? 미래학은 앞에 보이지도 않는 세계를 대상으로 연구하기에 다소 공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의 말잔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해 보고, 그 발생 가능한 미래를 상상해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실제로 현실로 닥쳐왔을 때를 대비해 대응책을 마련하든지 미래를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전략을 짜는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미래학을 공부하면 미래에 대한 적응력과 대응력이 개발된다고 말한다. 발생 가능한 미래를 미리 상상하고 준비하면, 실제로 그것이 닥쳐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대비 없이 갑자기 미래를 맞이하는 현상을 미래의 습격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에게 가장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예측되는 사건이다. 그러면 이것에 대한 모습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매우 미래학적이지 못하다. 가장 확실한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하여조차 금기시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태도는 태풍이 불어오고 있는데, 그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 작고 발생 가능성이 더 낮은 일에도 미래를 예측해 보고 대응책을 강구하는 현대인의 태도로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노인들의 90% 이상은 연명치료 없이 집안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기를 희망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90% 이상이 병원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자신이 원하지 않던 모습으로 죽고 있다. 호스피스 간호 기록을 보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천차만별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로 가는 기분으로 차분히 맞이하고, 어떤 사람은 불안과 공포로 발버둥 치며 떠난다고 한다.

미래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은 준비 없이 갑자기 오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전 세계의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발생 가능한 죽음의 모습을 상상해봐야겠다. 그리고 가능한 미래 죽음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봐야 할 것 같다. 남겨진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도 미리 준비해 놔야겠다. 그러면 실제로 그 순간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2월부터 본격 시행된다고 한다. 평소에 원하지 않던 죽음을 피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차제에 안락사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원하는 모습의 죽음을 꿈꾸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광형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겸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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