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신병주의역사의창] 쫓겨난 왕들의 최후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의 창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03-21 21:32:05 수정 : 2017-04-11 16:58:2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연산군은 가시울타리에 갇혀 지내
광해군 땅굴 파고 탈출하려다 발각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선고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은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약 4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났다.

조선시대에도 두 차례의 반정으로 왕들이 폐출됐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도로 들어갔고, 광해군 역시 강화도를 거쳐 교동도에 이배(移配)됐다가 제주도에서 최후를 마쳤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은 9월 7일 교동현으로 유배됐다. “지나는 길의 늙은이나 아이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나와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상쾌히 여기는 뜻이 있는 듯했다”고 ‘연산군일기’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연산군을 모시던 시녀들은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통곡을 했고, 호송한 관리들에 대해 연산군은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했다. 고맙고 고맙다”고 했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폐출돼 가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들은 원망의 뜻을 노래로 불렀다. “충성이란 사모요/거동은 곧 교동일세/일 만 흥청 어디 두고/석양 하늘에 뉘를 쫓아가는고/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구나” 했다. 관리들이 머리에 착용하는 ‘사모(紗帽)’를 연산군의 정치에 비유해 사모(詐謀)라 했고, 거동(擧動)과 교동, 각시(婦)와 가시(荊棘)의 음이 서로 유사함을 빌려 연산군의 행태를 조롱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유배 후 두 달 만인 11월 6일 역질(疫疾)로 사망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31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오랜 사치와 향락생활에 익숙한 그에게 좁은 가시울타리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된 직후 부인 유씨, 세자에서 폐위된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런데 강화로 옮긴 직후 폐세자가 연금된 집 안 마당에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됐다. 폐세자는 자진(自盡)의 명을 받아 죽고, 폐세자빈 역시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 1623년 10월 왕비 유씨가 세상을 떠난 뒤 광해군은 혼자가 됐지만 1636년 강화도 교동, 1637년 제주도 등 유배지를 옮겨 다니며 모진 세월을 견디다가 1641년 7월 1일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이달 1일에 제주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가운데 죽었는데 나이 67세였다. 부음을 듣고 상이 사흘 동안 철조(輟朝)했다. 이때에 제주목사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로 염습했다”고 하여 광해군의 최후 모습을 전하고 있다. 광해군의 장례는 연산군 때처럼 왕자의 예로 지냈다.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사망한 연산군과는 달리 광해군은 폐위된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으니 왕으로 재위한 15년보다 유배 기간이 더 길었다.

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시대 내내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들의 이름에는 왕자 시절의 호칭인 ‘군(君)’만이 남아 있다. 두 왕의 실록도 ‘일기’로, 무덤 역시 왕릉의 명칭 대신에 ‘묘’라는 말로 격하됐다.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대신에 소수의 측근에만 의존하는 권력자의 말로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준엄함을 되새겨 보아야 할 시점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