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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35〉문서 한 점 한 점에 담긴 역사의 무게

고문서 ‘세월의 먼지’ 걷어내면 변혁기 역사의 흔적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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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04 16:00:00      수정 : 2017-03-04 14:27:20
현재로부터 멀게는 수백년 거슬러 올라간 시절, 그때의 누군가가 써 내린 문서를 만져보고 내용을 들여다본다. 고문서 연구자의 일과다. 때로는 글자가 잘 읽히지 않아 괴로움에 시달린다. 지금은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옛 문자인 데다 반듯하게 인쇄된 글씨체가 아니다 보니 경험이 쌓인다 해도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다.

당연한 이치겠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남아있는 자료의 수는 줄어든다. 일찍이 공자도 “문헌이 부족하여 징험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역사도 시대가 멀어질수록 참고문헌이 부족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임진왜란 전인 조선 전기만 해도 그렇고, 고려시대로 올라가면 더욱 그렇다.


◆고려 국왕의 인장이 찍힌 두 문서

‘고려사’를 보면 1370년 5월(공민왕 19년) 명 태조가 금으로 만든 인장 하나를 고려로 내려주었는데, 이 인장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내용은 그저 옛 역사책에 적혀 있는 한 줄의 기록일 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인장이 찍혀 있는 실물 문서가 나타났다. 아무도 알지 못하던 곳에 꽁꽁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보물로 지정된 문서에서 새삼스레 확인된 것이다. 바로 보물 제1294호 ‘이제 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다. 그런데 이 문서는 조선을 개국하고 몇 달이 지난 1392년 10월 발급된 것이었다. 어떻게 조선에서 고려국왕의 인장을 사용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성계는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자리에서 국호를 고려로 유지하고, 제도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승계할 것을 천명하였다. 사실 조선이라는 국호는 태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393년에서야 비로소 쓰였다. 이것이 태조 즉위 초에 고려국왕의 인장이 여전히 사용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 배경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진 해인 1393년 3월9일에 이르러 명 태조로부터 하사받은 ‘고려국왕지인’을 다시 명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새로 나라를 세웠지만, 안팎으로 조심스러운 행보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초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201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특별전 ‘시권, 국가 경영의 지혜를 듣다’에서는 고려 말 발급된 원본 문서 한 점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조선 개국 3년 전인 1389년 9월에 문과 급제자 최광지에게 발급된 홍패(紅牌·문과 합격증서)였다. 이 문서는 전북 부안의 전주최씨 종중에서 전래된 자료였다. 고려시대 문서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 부여가 될 수 있지만, 고려시대 문서 가운데 ‘고려국왕지인’이 찍힌 유일한 사례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이로써 이 문서보다 먼저 발견된 ‘이제 개국공신교서’와 더불어 고려국왕의 인장이 찍힌 퍼즐 조각을 찾게 되었다. 


보물 제1294호 ‘이제 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1392년 이성계가 개국일등공신 이제에게 내린 공신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원나라 문자가 새겨진 고려시대 문서


고려시대에 작성된 원본 문서는 하나하나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는 문서의 수가 적다. 그래서 고려시대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는 발견만으로도 큰 관심을 받는다. 특히 1344년(충목왕 즉위) 4월29일에 신우(申祐)라는 인물에게 왕이 내린 관직 임명장이 알려졌을 때, 우리 학계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때까지 고려 말에 발급된 왕지(王旨)의 원본이 발견된 적은 없었고, 문서의 외형도 깔끔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몇년 후 이 문서를 면밀히 검토해 온 일본인 소장학자 가와니시 유야(川西裕也) 박사는 이 문서에 찍힌 인장을 판독하여 학계에 알렸다. 발견 당시부터 문서에 찍힌 붉은색 인장은 또렷하였지만, 국내에서는 판독해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가와니시 박사에 따르면 이 문서에 찍힌 인장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때 창안된 팍파(’Phags-pa, 八思巴) 문자로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이라고 새겨진 인장이었다. 고려말 원(元)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세계 제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고려는 원 황실의 부마국이라는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 황제가 고려국왕에게 ‘부마국왕금인’을 내려준 사실이 ‘고려사’와 ‘원사’(元史)에도 기술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관심은 부마국이라는 특수한 시기에 작성된 다른 고려 말 문서들로 확대될 아주 중요한 퍼즐 조각이었던 것이다.


김한계 조사문서. 1448∼1449년 발급된 원본으로, 김한계를 승문원 부교리와 사간원 좌정언에 보임한 사실을 담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조선 초, 문서가 보여주는 디테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2009년 개최했던 ‘공주의 명가’ 특별전에서는 1401년(태종 3) 4월에 문과 급제자 노혁에게 발급된 홍패가 전시되었다. 조선시대 문과 홍패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서의 출현이었다. 문서에 적힌 ‘동진사’(同進士)라는 표기는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일컫던 진사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 제도 용어였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과거 제도에서 사용된 문과의 등위 구분 중 하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과 합격자 가운데 고득점자인 을과(乙科)와 병과(丙科) 합격자들에게만 ‘급제’라는 표현을 썼고, 그 아래 등급인 동진사 합격자들에게는 ‘출신’이라는 표현으로 엄격히 나누어 사용하였다.

올해 1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예고에는 조선 초기 문서 2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식 명칭은 ‘김한계 조사문서’(金漢啓 朝謝文書)로 2015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문서는 각각 1448년(세종 30)과 1449년(세종 31)에 발급된 원본이고 내용은 문관의 인사를 담당한 이조에서 왕명에 따라 김한계를 승문원 부교리와 사간원 좌정언에 보임한 사실을 담고 있다. 오늘날도 고위 공무원은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주고, 하위 공무원은 부처 수장 명의의 임명장을 주듯이 조선시대에도 4품 이상의 고위 관원에게는 왕의 교지(敎旨)로 임명장을 주었고, 5품 이하에게는 이조와 병조에서 임명장을 발급하였다.

그런데 이 문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임명장에 대한 상식이 정립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큰 변화의 시기였던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관원의 인사권에 대한 왕과 신료들의 미묘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기존에는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던 조선 초기 인사제도의 일면을 바로 고려 말과 조선 초에만 존재하였던 조사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 후대에 기술해 놓은 가공된 정보가 아니라, 그 시대에 작성된 원본 문서가 전해주는 짧고 굵은 감흥은 바로 이런 디테일에서 나온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현재의 문서가 곧 훗날의 고문서로


조선 전기를 벗어나면 고문서의 수효가 수십만 점으로 급증한다. 조선 전기 문서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의 문서들을 접할 수 있다. 일상에서 사고팔고 다투고 호소하는 등의 인간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 고문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근대의 신분제 속에서 약자로 살아간 노비들의 삶이 투영된 문서도 있고, 어려운 시절을 만나 궁여지책으로 자신을 스스로 내다 판 계약 문서도 보인다. 삶의 고단함이 전해진다.

조선을 지나 제국을 선포하였던 대한제국기의 문서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기민하게 수용하고자 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시대의 변화를 맞이한 외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시행한 개혁은 문서에도 적용되었다. 국가의 관제와 직제가 크게 바뀜에 따라 문서에 사용된 용어들도 바뀌었고, 문서의 외형적 모습도 규격화, 도식화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정부 수립기, 한국전쟁기 등 우리 역사의 치열했던 근현대사를 지나면서 생산된 헤아리기조차 힘든 방대한 양의 문서들도 머지않아 고문서, 고기록으로서 그 자료를 찾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질 것이다.

지금 고문서 연구자가 붙잡고 고심하는 고문서도 당대에는 그 시절의 행정문서, 법률문서, 일상 기록으로 존재한 상식적인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대다수가 후대에까지 전래되지 못하고 일부만이 전래된 탓에 수천 수만 피스의 퍼즐 맞추기 같은 고민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남겨진 자료와 남겨지지 못한 자료들, 저마다 사실임을 주장한 문서들, 이를 둘러싼 각기 다른 의견들 등 한 점의 문서가 담아낸 역사적 흔적을 온전히 밝혀내었노라고 단언하기에는 문서 한점 한점에 담긴 역사의 무게가 그리 녹록지는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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