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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민생·경제 절박한 문제… 대선후보들 ‘숙성된 공약’ 내놔야”

입력 : 2017-02-03 21:00:00 수정 : 2017-02-03 20: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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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행정고시에 합격해 16년간(미국 유학 6년 포함) 공무원을 하다 가족을 부양하기엔 봉급이 부족하다고 여겨 사립대학 교수로 전직했으나 8년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어 대통령직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 팀장,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국정기획수석비서관, 고용노동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을 두루 거쳤다. ‘친정’인 성균관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는 박재완(62)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박재완 전 기재부 장관. 이재문기자
재무부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박 교수를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보좌관으로 발탁한 데 이어 정계에 입문시키는 등 그의 공직생활에 큰 영향을 준 인사는 지난달 타계한 박세일 전 국회의원이다. 통일과 선진화를 위해 설립한 한반도선진화재단은 박 전 의원 뒤를 이어 박 교수가 이사장직을 맡아 이끌고 있다. 이명박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박 교수는 정권 출범 후 촛불집회, 글로벌 금융위기, 유로존 부채위기까지 겹쳐 인수위가 입안한 개혁정책이 예정대로 추진되지 않고 유보 또는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호암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 박세일 전 의원과 인연은.

“박 전 의원이 1994년 12월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에 임명된 뒤 수석비서관 보좌관을 맡아달라고 해 인연이 됐다. 그 전에는 서로 몰랐다. 박 전 의원이 사회복지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같이 이동했다. 청와대에서 박 전 의원을 1년 3개월간 모셨다.”

― 1996년에 공직을 그만두고 교수가 됐다.

“주된 원인은 공무원 봉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아이 둘을 키워야 했고 노모가 계셨다. 배부른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엔 공무원 봉급으로 생활하기가 정말 빠듯했다. 아내가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나면 진짜 돈이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가장의 책임은 가족을 부양하는 것인데 ‘수신제가’도 못하면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사립대학이지만 학생을 가르치고 국가 정책에 관한 연구, 발표하는 것이 국익에 보탬이 되고 보람도 있다고 판단했다. 박 전 의원은 공직에 남아 있으라고 강력히 만류했었다.”


이명박정부에서 대통령직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팀장, 대통령 정무수석, 국정기획수석비서관과 고용노동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는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으로 조기 대선이 실시되면 인수위 과정이 없어 차기 정부 초기에 혼란과 불확실성, 학습비용 등이 예상된다”며 “여야 대선 후보들은 집권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재문 기자
― 정치를 하게 된 동기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국회 탄핵 의결 후 나라가 어지러웠다. 한쪽으로 쏠림현상이 일어났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인기는 폭락했다. 한나라당 부름을 받아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은 박 전 의원이 나라가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한쪽으로 기울면 위험하다며 함께 국회에 들어가자고 권유했다. 박 전 의원은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려면 혼자만으로 안 되며 뜻이 같은 여러 명이 힘을 모아야 가능하다는 점을 느꼈다고 한다. 나와 윤건영 연세대 교수, 이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 3명이 17대 국회에 같이 갔다. 박 전 의원은 여의도연구소장, 나는 정책담당 부소장으로 당의 정책개발에 앞장섰다.”

― 이명박정부에서 잘 나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전에 잘 몰랐다. (이 전 대통령) 서울시장 시절에 딱 한번 봤다. 2006년 정두언 의원 소개로 오찬을 단둘이 했다. 그때 도와달라는 말씀을 하지 않고 경선에서 누가 후보가 되든 대선에서 이기려면 조직도 필요하지만 좋은 정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나보고 ‘당신이 정책에 열정과 아이디어가 있다고 들었는데, 훌륭한 정책을 만들어 달라’고 얘기했다. 그 후 공식 회의에서 인사했으나 따로 만나거나 전화를 한 적은 없었다.”

― 대통령직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 팀장하면서 무슨 작업 했나.

“정부조직개편을 주도했다. 정부수립 후 최대 규모의 정부조직개편이었다. 부총리제와 해양수산부,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기획예산처, 통일부, 여성가족부를 없애고 장관급인 법제처장과 보훈처장을 차관급으로 낮추고, 경호실장도 경호처장으로 바꾸고 차관급으로 조정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국가청렴위원회를 통폐합해 국민권익위원회로 했다. 2007년 12월26일 인수위원에 임명돼 20여일 만인 2008년 1월18일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국회 통과과정에서 당시 여권의 반대로 통일부, 여성가족부는 막판에 살아났다. (인수위 개편안은 2원 13부 2처 17청 4실 5위원회이었으나 국회에서는 2원 15부 2처 18청 3실 5위원회로 통과됐다.) 집권을 예상하고 사전에 10개월 정도 미리 준비한 것이 밑거름이 됐다. 언질을 준 사람이 없었지만 누가 그 작업을 하더라도 내 안을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연구했다. 당시 행정자치부도 정부조직개편안을 준비했더라.” 
― 인수위가 마련한 정책이 그대로 집행됐나.

“집행된 것도 있지만 안 된 것도 많다. 우선 정권 출범 해인 2008년 촛불집회가 100일 동안 계속됐다. 민심 수습을 위해 일부 개혁을 철회 또는 변경했다. 한반도 대운하의 경우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더 큰 변화는 그해 9월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며 생겼다.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1929년 대공항 이후 거의 80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세계경제위기가 도래했고, 그 여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엔 유로존 부채위기까지 오며 2차례 경제위기를 맞았다. 인수위 시절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 급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경제위기를 극복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많은 과제, 특히 산업은행 민영화 등 구조개혁 등은 후순위로 넘겨지거나 사실상 유보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상흔을 많이 입었던 국민은 글로벌 금융위기나 유로존 부채위기 그런 것이 있었나 할 정도로 지나갔지 않았나. 유럽의 여러 나라, 특히 남부권에 있는 나라들은 10년 전보다 경제규모가 쪼그라들었다. 반면 우리는 그 기간에 한번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지 않고 계속 플러스 성장을 해 모범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가신용등급도 올라가 나름 선방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방이 시사하듯 위기를 방어했다는 것이지 공격적으로 뭘 치고 나가기는 어려워 많은 국민이 고통을 당한 데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 여파가 여전히 미치고 있는데 상흔을 딛고 다시 한번 도약해야 할 것이다.”

― 여야 대선후보들이 요즘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대선후보들은 숙성된 공약을 발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불쑥불쑥 던져 놨다가 나중에 공약대로 안 해서 욕을 먹고, 설익은 공약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도 문제다. 오랫동안 준비를 해 알찬 공약을 숙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 때는 주로 캠프 위주로 돌아가는데 캠프는 공식 조직이 아니고 비공직 조직이다. 공약이 몇몇 사람의 의견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고, 충분한 공론, 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급조된 공약이 있다. 대선, 총선, 지방선거 때 주요 정당 공약은 선관위에 등록해야 한다. 지금도 선관위에 주요 공약을 등록해 선거공보물에 게시하고 있는데 선거 3∼4개월 전 시한을 정해 공약을 등록한 후 수정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안 그러니까 공약을 놓고 서로 베끼고 경쟁을 한다. 선관위는 공약 가운데 실제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검증해 비용추계를 발표해야 한다. 그래야 무책임한 공약을 발표 못하지 않겠는가.”

― 여야 정당에 연구소가 있다.

“김영삼정부 때 정당 부설연구소가 출범했고 그동안 많이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야 막론하고 부설연구소에 지원되는 국고보조금 중 상당수가 사무처 직원의 인건비로 전용되고 있다. 정당 부설 연구소 위상은 떨어지고 내실 있게 운영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개선해야 할 대목이다.”

― 대통령 수석비서관 하며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고 들었다.

“가끔 잤다. 경기도 성남이 집인데 멀어 사무실 간이침대에서 잠자곤 했었다. 공무원이 힘들어야 국민이 편하다는 게 이 전 대통령의 지론이다. 나도 동의한다. 평생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짧은 기간에 열심히 해 조금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장관은 그렇게 안 되더라. 장관이 안 나가면 비서실 직원이 퇴근을 안 했다.” 

― 청와대에 근무하며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게 어려웠나.

“정무직 공직자의 자세는 선공후사다. 그런 관점에서 대통령 비서진은 대통령에게 고언도 하고 반대도 해야 한다. 좋은 약이 입에 쓰지만 몸에 이롭지 않나. 청와대에 있을 때 이 전 대통령에게 정책과 관련해 정말 반대를 많이 했다. 손꼽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전 대통령은 회의 때 먼저 얘기를 하지 않고 다 들어 보고 결정하는 스타일이다. 참모들은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몇시간씩 치열하게 토론을 하곤 했다. 오죽하면 봉숭아 학당이라고 했겠는가.”

― 정·관·학계에 있으면서 느낀 점은.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다 책임감이 느껴지고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 자동차 경우 여러 부품 가운데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어느 자리든 소명, 역사의식이 깃들어 있어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

―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소개하면.

“2006년에 박 전 의원 주도로 통일과 선진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설립됐다. 한반도는 통일을 시사한다. 한민족 공동체의 가장 큰 숙제는 남북통일이다. 남북통일을 하려면 주변 4강의 협조가 있어야겠지만 우리 스스로 통일에 대한 방관적 태도, 이기적이거나 소극적 자세로는 이룰 수 없다. 우리나라 국력이 신장되고, 통일 전략도 다듬어야 하지만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결기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미국, 중국 등이 한반도와 한민족을 만만하게 보지 않고 우리의 주장을 귀담아듣고 자신들의 전략에 반영하지 않겠는가. 재단은 그런 의미에서 자강, 동맹, 균세 3대 원칙을 지향하고 있다. 통일 후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다. 통일을 대비해 복지, 교육, 인프라 등을 준비해야 하며 이런 일을 정부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연구해야 한다. 또 낙후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 제도, 규범, 문화 등을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종합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다. 박 전 의원의 유지를 받들어 재단을 알차게 키우겠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박재완은


△1955년 경남 마산 출생 △부산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 정책학 박사(미국 하버드대) △행정고시 합격(23회) △총무처 근무,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사무관 △감사원 부감사관, 재무부 행정사무관, 대통령비서실 서기관 △1996~2004, 2013년 성균관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현) △한국공공정책연구소 소장 △성균관대 입학처장, 기획조정처장, 사회과학연구원장, 국정전문대학원장 △ BK21핵심사업팀장협의회 공동의장 △경실련 정책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한나라당)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제3정책조정위원장, 대표비서실장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팀장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국정기획수석비서관, 청불회 회장 △고용노동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현) △(재)이명박대통령기념재단 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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