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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물감이 섞이며 나타나는 새로움… 내겐 작업이 테라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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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14 21:07:55 수정 : 2016-07-14 21: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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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받는 신예작가 지안 “그림을 그린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얘기다. 선생님들은 늘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증에 매달려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누구보다도 잘 그렸지만 선생님들은 그것조차도 내려놓기를 바랐다. 진정 ‘그리기 위해서는 그리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선문답 같은 요구였다. 테크닉에 안주하는 나를 일깨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제야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새내기 작가는 붓조차도 내려놓고 물감을 캔버스에 붓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최대한 작위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다. 지난주 파주 출판단지 작업실에서 만난 지안(29) 작가의 모습이다.

수은주가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도 작가는 물감과 캔버스를 삶의 파트너 삼아 씨름하고 있었다. 때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길에 이르리라는 믿음에서다.

“막막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강을 건너기 위해선 절망과 고뇌마저도 징검다리 삼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지요.”

사실 작가로 생존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힘든 일이다. 창작자는 그래서 존경을 받고 가치가 부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해선 엄청난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또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선택이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새로운 작업을 모색하고 있는 지안 작가. 최근 홍콩 전시 등 그를 불러주는 곳이 많아지면서 주목받는 신예작가로 부상하고 있다.
물감에 범벅이 된 그의 작업복이 땀으로 절었다. 또래의 싱그러운 청춘의 모습이 아련하다. 캔버스에 쏟아진 화려한 물감만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애꿎게 그에게 물었다. 붓기(pouring) 기법은 많은 유명한 작가들이 이미 시도했던 것이 아닌가. 돌아온 답변은 그렇다면 붓을 사용하는 것도 구태의연한 방법이 아니냐고 되받아쳤다.

“페인팅에서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닌 무엇을 담고 있느냐라고 생각해요. 저는 마냥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초등학교 때 미술을 시작했고, 실기시험을 통과해야만 들어가는 중학교(예원학교)에 들어가려고 입시 미술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입학을 한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또다시 입시 미술을 해야 한다기에 부모님께 유학을 보내 달라고 졸랐지요.”

그는 입시 미술이 아닌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미술을 위해 미국의 ‘인터로컨 아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언어가 미숙했던 것이 장애가 됐다. 수업 시간에 작품을 설명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주로 사실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시카고 미대(SAIC)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홍익대 대학원을 마치고 보니 제 머릿속엔 미술 이론만 가득 찬 것 같은 답답한 느낌이 들었어요.”

많은 얼굴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figure’
그는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의 그림을 그렸고, 어린이와 정신병자의 그림에서 순수성을 보았고,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의 작품보다 더 훌륭하게 평가했는지 공감이 됐다.

“제 머릿속에는 항상 잘 그렸다고 생각하는 그림 이미지의 틀이 정해져 있었고, 그런 틀에서 나온 그림들은 진부할 수밖에 없었지요. 잘 그린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그림을 망치는 법을 고민했어요. 맨발로도 그려보고, 종이를 하늘에 붙여 놓고 그려보고, 눈을 감고도 그려보고. 불편한 자세를 잡아가며 내 머릿속 의지와 멀어진 오로지 순수한 표현을 담아내는 법을 고민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기법이 붓기였다. 여전히 붓기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붓기 기법에 의해 붕괴된 형태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했다.

“붓기 기법에 의해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은 제게 매번 많은 것을 발견하게 해줬어요. 자발적으로 퍼져나가는 물감의 운동성은 묘한 생명감을 보여주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멈추고 남겨지는 흔적은 죽음을 떠올리게 해주지요. 서로 다른 곳에서 흘려보낸 물감들이 만나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내고, 의도한다 하더라도 제어할 수 없는 물성이 너무 자연적이어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테라피(Therapy)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예술은 테라피라는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이론이 있다.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나 그것을 보는 사람 모두 자신의 삶에서 모자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종류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대부분의 작가는 구상을 통해서 추상으로 가게 마련이다. 새내기 작가가 추상으로 시작하다 보면, 자칫 작품 스토리 전개에 어려움을 겪기 쉽다.

“펠릭스 곤살레스와 트레이시 에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시스코 로드리게스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이에요. 이렇게 놓고 보면 내가 어떤 종류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알아채기 힘들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작품이 그들의 삶이고, 삶이 그들의 작품이라는 점이지요. 죽은 연인을 그리는 펠릭스 곤살레스,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는 트레이시 에민, 자신이 겪어온 고통이나 죽음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그리고 일기 쓰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싱어송라이터 시스코 로드리게스였지요. 자신의 삶으로 작품을 말하는 작가라면, 삶이 시간과 함께 변화하듯이 그 변화를 작품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삶이기 때문에 이야깃거리가 고갈되거나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에 제약을 받지 않을 겁니다.”

물론 지금 그의 작품이 그의 삶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그들과 같은 작가이기를 소망하고 작가의 길을 걸어 갈 뿐이다. 물론 중간중간 잘 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는 파울루 코엘류의 저서 ‘연금술사’의 한 대목을 소개했다. “그대가 여행길에서 발견한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때 그대의 보물은 발견되는 걸세”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 말을 믿는다.

그는 예술작품에 꼭 명확한 메시지(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인 예술의 애매모호한 상태를 믿고 지지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당신이 위대한 작품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너에게 위대한 작품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어요. 저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궁금증을 유발해내는 작품들이 매력적인 신비감으로 다가오게 마련이지요.”

무엇보다 새내기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움이다. 그도 작품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다녔다. 그래서 한국적이지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서구적이지도 않은 경계에서 그만의 특색을 찾아가려고 한다.

요즘 그는 절제된 자유로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붓기 기법을 사용해 유영하는 물감의 자유로움과 계획된 선을 통해 그것을 억제하는 모습을 한 캔버스에 배치하며 그 대비를 즐기고 있다. 그리지 않음을 통해 비로소 서서히 그리기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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