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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종주국 중·일서도 극찬… 세계 최고 입증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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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17 21:02:46 수정 : 2016-06-17 21: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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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보릿대 자개’ 맥간공예 창시자 이상수씨 ‘천하지사 불진즉퇴(天下之事 不進則退·하늘 아래 모든 일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게 된다).’

‘맥간(麥稈) 공예’의 창시자이자 맥간공예연구원장인 이상수(58)씨는 17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올렸던 진언 가운데 한 구절을 소개했다. 전통공예 현장을 이를 악물며 지켜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이 원장은 “배고픈 예술의 길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이 수십년간 길러온 제자들이 생계를 위해 하나둘 곁을 떠나는 현실”이라며 “하지만 공예의 종주국이라 일컫는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맥간공예’의 예술성을 높이 사고 있는 만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내 길을 걷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상수 맥간공예연구원장이 작품을 배경으로 보릿대 문양작업을 하고 있다. 이 원장은 맥간공예가 돈이 되지 않는다며 제자들이 떠날 때 가슴이 미어졌다고 전했다.
맥간공예는 말 그대로 보리줄기, 즉 보릿대를 이용해 자개문양을 수놓는 공예다. 질감과 색감이 부드러우면서 은은한 맛이 깊어 자개공예와는 구별된다.

이 원장의 맥간공예는 타고난 재능에 ‘삶의 한’이 겹치면서 빛을 보게 됐다. 1958년 경남 밀양에서 부농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1년 때 부친을 여의자 가족들과 함께 친척이 있는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했다. 중 1때 어머니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의지하던 형이 가출하자 그는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고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싸움판을 전전하기도 했다. 동네에서조차 ‘외톨이’인 그에게 어느날 스님이 된 형이 찾아와 ‘미술재능을 살려 새 삶을 찾아보자’고 설득한 게 맥간공예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경북 청도의 한 사찰에서 탱화를 그리며 예술가의 꿈을 키우던 그에게 어느날 길가의 ‘보릿단’이 눈에 들어왔다. 잘 썩지 않고 은은한 빛을 내는 보릿대를 이용하면 좋은 예술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활용방안이었다. 보릿대를 이용해 자연의 질감이 살아 있는 예술작품을 구현해 보기로 한 그는 2년여의 시행착오 끝에 넓은 자개판 같은 보릿대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폭 1m, 길이 2m 크기의 보릿대종이를 만들어야 작품활동이 가능한데, 보릿대의 빛깔과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그 정도 크기의 종이를 만들 수가 없었다”며 “2년여간 보릿대에 짓무른 손을 부여잡고 연구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보릿대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사찰을 나온 그는 상경해 밤에는 일을 해 돈을 벌고 낮에는 맥간을 연구하거나 공예분야 예술가를 만나 작품 아이디어를 얻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1982년 보릿대로 종이 만드는 기법에 대한 실용신안 특허를 받았다. 이어 염색 없이 전통 5색(빨·주·노·초·파)이 보릿대에 스며드는 기법까지 창안해 맥간공예를 탄생시켰다. 맥간공예는 12∼14단계를 거쳐 작품이 만들어지는데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힘든 생활을 하며 1986년까지 27점의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또다시 벽에 부딪혀야 했다. 낯선 장르의 예술인 데다 이씨의 미천한 경력과 비용 문제로 전시가 거부됐기 때문이다.

그는 “밤에 번 얼마 안 되는 돈과 하루 3시간도 안 되는 쪽잠을 자며 만든 작품이 전시되지 못할 때는 큰 절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포기할 수 없어 수원에서 전시관을 수소문하던 중 한 곳으로부터 작품전시가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고는 너무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며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폭발적인 관심 때문에 주변 지인들이 모두 놀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하 20여평 규모에 전시된 작품은 전시회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 팔렸고 개관 이래 가장 많은 관람객이 다녀가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어진 전시로 맥간공예의 예술성이 알려지면서 내로라하는 국내 전시관은 물론 중국과 홍콩·싱가포르 등지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의 단골 초대손님이 됐다.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수여하는 ‘제3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을 수상하고 경기도 으뜸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원장은 “전시회 이후 여러 곳에서 강사로 초빙되고 6개월에 한 번 꼴로 방송에 출연하는 유명인이 됐다”며 “전국 10여곳에 맥간공예를 연구하는 예맥회가 세워졌고 수천명의 문하생을 두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돈벌이’가 되지 않자 하나 둘 제자들이 떠났고 예맥회도 대폭 축소됐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전통문화와 예술을 좇는 사람들이 겪는 공통된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그는 “보릿대를 이용해 일반인이 생각하지 못한 맥간공예를 탄생시켜 세계를 놀라게 한 것처럼 전통재료를 이용한 여러 장르의 공예작품을 창작해 한국이 공예예술분야에서 최고임을 꼭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수원=김영석 기자 lovek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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