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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눈] 반 총장이 하회마을서 놓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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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01 22:15:28 수정 : 2016-06-02 02: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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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풍파에 신물… 류성룡 은거의 말년 알았을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최근 찾았던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는 ‘옥연정사(玉淵精舍)’라는 자그마한 고택이 있다. 낙동강 물길 건너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용대 기슭에 자리한 정갈한 조선시대 가옥이다.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고향인 하회마을에서 그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서애는 45세에 이 집을 지었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반 총장이 찾았던 충효당과 양진당은 모두 서애 선생 사후 후손들이 세운 종택으로, 서애가 생전에 생활했던 곳은 아니다.

반 총장은 하회마을 방문에서 ‘류성룡 이미지 차용’을 위해 무척이나 애쓴 것 같다. 충효당에서 류성룡 종손들과 식사를 함께 했고, 그 앞마당에 ‘나무의 제왕’이라는 주목을 심었다. 방명록에는 서애의 ‘조국 사랑’을 기리는 글도 남겼다.

박창억 정치부장
내년 대선 출마 의지를 내비치고 새로운 리더십을 선보여야 하는 반 총장에게 서애는 구미에 딱 맞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내부 역량을 모으고 주변국을 설득해 임진왜란의 위기를 이겨낸 서애는 국난극복·국민통합의 지도자라는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데 제격이다. 이 선현이 현 집권 세력의 지역기반인 대구·경북(TK) 출신이라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 총장이 서애의 삶에서, 하회마을 방문에서 놓친 대목이 있다. 2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는 당대의 경세가이자 행정가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그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서애가 출사(出仕)해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어지러운 당쟁이 계속됐다.

성품이 원만하고 정치적으로 온건했던 서애였지만 그 역시 서인과 북인의 공세에 시달렸다. 40대 후반에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겪으며 여러번 사직을 요청해야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세에 몰려 면직됐고, 또다시 1598년 북인의 탄핵을 받아 영의정에서 파직된다. 삭탈관직된 서애가 하회마을로 내려와 머물던 거처가 옥연정사다. 대표 저작인 ‘징비록’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2년 후 관직이 회복되고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이를 한사코 거절하고 은거할 정도로 그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평생 외교공무원으로 살아온 반 총장이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반 총장이 대선 출마를 시사하자, 벌써 정치권에는 그와 관련한 온갖 흉흉한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반 총장은 제주의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최근 제기된 의혹에 대해 “기가 막힌 일”이라고 혀를 찼지만, 그가 대선에 뛰어들면 더 기가 막힌 일들이 숱하게 벌어질 것이다.

정파를 떠나 두루 후대의 추앙을 받았던 서애도 현실정치가 무척이나 고단했던 모양이다. 서애는 옥연정사를 지은 후 그 소회를 적은 ‘옥연서당기’에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딪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며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썼다. 또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山野)에 알맞지, 성시(城市·도시)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반 총장이 하회마을 방문길에 옥연정사에 들러 서애의 말년을 되돌아봤다면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반 총장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이기에, 자신을 ‘답답하고 슬픈 고라니’에 빗댄 서애의 글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박창억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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